정보산업시대로 바뀌며 달라진 놀라운 업무 환경 중 하나는
산업시대와 달리 자택근무가 가능해졌다는 것이다.
언제나 그렇듯 이 또한 양날의 검으로
좋은 점과 나쁜 점이 존재한다.
좋은 점은 굳이 회사라는 공간에 얽매일 필요가 없어졌다는 것이고,
나쁜 점은 노동력을 구속하는 사슬의 범위가 집까지 넓어졌다는 것이다.
어쨌거나 카피라이터라는 직업은 때때로
자택근무를 하게 되는데
어떤 사람은 집에 가서 혼자 있으면 오히려 생각이 잘 난다고 하고
어떤 사람은 집에 가면 일이 잘 안 된다고 하는데
나라는 사람은 그냥 아리송할 때가 많다.
집에서 나온 아이디어가 잘 먹힐 때가 있고
그렇지 않을 때도 있고
일 하는 당시의 컨디션에 따라 결과가 달라지는 것 같은데,
자택근무의 경우는 ‘일하는 당시의 컨디션’의 영역에
‘집안 꼬라지’가 한몫을 담당한다.
한 달 넘게 쌓인 빨랫감이 발치에 굴러다닌다거나
갖가지 hair가 꼬불꼬불 망막에 만져지는 환경에서
잠이 덜 깬 더벅머리를 긁적이며
사각팬티 하나만 입고 노트북 앞에 앉았을 때
더구나 그 사각팬티엔 지난 밤 자위의 흔적이나
이승의 것이 아닌듯한 꾀죄죄한 냄새가 베어있을 때
그런 상태로 정갈하며 신념에 찬 금융 광고 카피를 써야 할 때
이거 이래도 되나,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한다.
물론, 환경의 지배를 초월할 수 있을 정도의
고급 정신을 가진 분들이라면
자택근무에 있어서도 어떤 흔들림도 없을 것이다.
오랜 감옥 생활 혹은 도피 생활 중에도 흔들림 없이
자신의 생각을 갈고 닦았던
닐슨 만델라 선생이나, 신영복 선생, 김구 선생, 호치민 선생 같은 분들은
팬티 바람으로 집에서 카피를 쓰더라도
또릿또릿하게 쓰고자 한 바를 잘 쓰실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훌륭한 정신을 지닌 분들이
헤헤 헤헤 거리며 비위 맞추는 카피를 쓰실 리는 없고
좀 더 어린 연차 때 느꼈던 자택근무의 기분
‘아 나 집에서도 일하고 좀 멋진데’와
요즘 느끼는 어떤 진실되지 못한 것에 대한 불편함
‘사람들은 자기들이 보는 광고의 카피가 어쩌면 냄새나는 아저씨가 팬티바람으로 쓴 걸지도 모른다는 걸 알까’라는,
이를 테면 그 뺀질뺀질한 현대카드가 사실은 누군가 코딱지 후벼가며 손끝에 딸려나온
코딱지 덩어리를 그냥 컴퓨터 옆 책상에 문대가며
“그래서 우리는 감각적이다”
라고 쓴 걸지도 모른다는 사실은,
그 위로 덮이는 몇 겹의 포장과정을 통해 깨끗이 묻혀버린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요즘의 나를 불편하게 한다.
이를 테면 그 폼나는 패션브랜드며 운동화들, 커피 전문점들이
제 3세계 누군가의 노동력을 착취해가며
만들었을지 모르지만
그 제품의 광고를 보며 와우! 죽이네! 싼다싸! 이러며 홀딱 반하는 사람들과
그런 사람들을 보며 “해냈어”라고 하이 파이브 하며
단란업소로 향하는 광고제조업 사람들로 이뤄진 세상이라는 것,
으로까지 생각은 확산이 된다.
뭐 암튼 그래서 요즘은
일단 샤워를 하고
커피를 내리고
소음을 모두 차단하고
가급적이면 진심을 담아 해보려고 한다,
일요일 자택근무도.
헤헤 헤헤 해야 히히 히히 좋아하는
광고주나 윗사람들 때문이 아니라
20분만 빨리 나오거나 30분만 늦게 나와도
꽥꽥거리는 만원 전철을 피할 수 있을 텐데도
그러지 못하고 결국 또 빽빽하게 찡겨 만원 전철을 탈 수밖에 없는
정말 왜들 저러나 싶으면서도
저럴수밖에 없게 만드는 현실을 함께 살아가는
내 통장 월급의 근원, 소비자들 때문이다.
가끔 화창한 날임에도 불구하고
왠지 몸이 뻐근하고 무겁다 싶을 때면
또 지구 어딘가에서 몹쓸 놈들이 몹쓸 짓들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반면 별일 없어도 미소가 지어질 때면
어딘가 모르는 누군가 좋은 노력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자기만족 과대망상일지 모르지만
내 몸속 발끝 어딘가에 평생 마주칠 일 없는 헤모글로빈 하나가
나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본다.
나는 이 지구에 좋은 헤모글로빈이 될 수 있을까...
좋은 카피라이터가 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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