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만히 좋아하는, 김사인, 창비, 2011(초판12)

 

 

 

 

 

 

유필遺筆

 

 

남겨진 글씨들이 고아처럼 쓸쓸하다

 

못 박인 중지마디로 또박또박 이름을 적어놓고

 

어느 우주로 스스로를 흩었단 말인가

 

겨울밤

 

우물 깊이 떨어지는 두레박소리

 

 

 

 

 

 

 

인절미

 

 

외할머니 떡함지 이고

이 동네 저 동네로 팔러 가시면

나는 잿간 뒤 헌 바자 양지 쪽에 숨겨둔

유릿조각 병뚜껑 부러진 주머니칼 쌍화탕병 손잡이 빠진 과도 터진 오자미 꺼내놓고

쪼물거렸다

한나절이 지나면 그도 심심해

뒷집 암탉이나 애꿎게 쫓다가

신발을 직직 끈다고

막내 이모한테 그예 날벼락을 맞고

김치가 더 많은 수제비 한 사발

눈물 콧물 섞어서 후후 먹었다

스피커에서 따라 배운 노란 샤쓰한 구절을 혼자 흥얼거리다

아랫목에 엎어져 고양이잠을 자고 나면

아침인지 저녁인지 문만 부예

빨개진 한쪽 볼로 무서워 소리치면

군불 때던 이모는 아침이라고 놀리곤 했다

저물어 할머니 돌아오시면

잘 팔린 날은 어찌나 서운턴지

함지에 묻어 남은 고운 콩고물

손가락 끝 쪼글토록

침을 발라 찍어먹고 또 찍어먹고

 

아아 엄마가 보고 싶어 비어지는 내 입에

쓴 듯 단 듯 물려주던

외할머니 그 인절미

용산시장 지나다가 초라한 좌판 위에서 만나네

웅크려 졸고 있는 외할머니 만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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