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속 5000킬로미터, 마누엘레 피오르, 미메시스, 2011(초판1)

 

 

 

 

 

 

철길 따라 늘어선

아무도 없는 객차에 앉아

창문 너머 멀뚱히 바라보니

현재가 과거를 부수고 있더군.

문득 네 얼굴도

지난여름처럼 변했겠지.

땅바닥에 천천히 내려놓은

그때 그 옷처럼.

 

페데리코 퓨마니, 「엘레나」(1984)의 가사 한 구절

 

 

 

 

 

벤자민 고무나무를 어떻게 다뤘는지 좀 보렴….

이 아이도 이사 때문에 고생했어.

식물들도 적응할 시간이 필요하단다.

사람이랑 똑같아. 식물도 새로운 장소에 적응해야 하지.

그렇지 않으면 불행해져. 이 포도담쟁이는 벤자민 고무나무 옆에 둬야겠다.

 

 

 

 

 

이 열매 참 예쁘네요. 뭐예요?

 

만지지 마라. 지독한 냄새가 나거든.

 

노르웨이어로는 스폴레부스크(spolebusk)라고 하지. 독성이 아주 강하단다.

한 줌으로도 말 한 마리를 죽일 수 있어.

참 묘하게도 꽃말은 기쁨과 부드러움이라고 하지.

옆집 아이들이 먹지 못하게 뒤뜰에 심을 걸 그랬어.

 

우리 어머니도 식물에 대해선 뭐든 다 아세요.

전 그런 재주를 하나도 물려받지 못했죠.

이혼하셨을 때, 아파트 안을 식물로 가득 채우셨던 생각이 나요.

그게 벌써….

정확히 10년 전이네요.

 

그게 말이다. 사람들을 더 이상 믿을 수 없게 되면

식물을 좋아하게 된단다.

 

 

 

 

 

그러면 핫산이 뭐라고 하는지 아나?

그건 자유나 행복에 관한 문제가 아니라고, 올바른 선택에 관한 문제라고 말하지.

집을 떠나 먼 곳에서 산다는 건 정상이 아니지.

제 집을 내버려 두는 건 올바른 선택이 아냐.

우린 결코 이곳 사람이 될 수 없네. 하지만 떠나는 순간, 우린 우리가

떠난 그 장소에도 더 이상 속하지 않게 된 거지.

이곳에서 우린 영원한 이방인이야.

또 시간이 지나면 우리가 사랑하는 이들도 우릴 이방인으로 보겠지.

우리는 스스로를 자유롭다고 생각하지.

하지만 우리는 유배자, 방황하는 영혼일 뿐이야.

피에로, 올바른 선택을 하게나.

아직 할 수 있을 때 말일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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