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안 2012 봄
콩새와 함께
김은자
짧은 겨울 오후
발이 잘린 나무들이
안개 속에 둥둥 떠다니고
사람들은 빨리 걷는다
주유소를 지나고 강가를 따라
콩잎이 푸른 콩밭을 지나
빨리빨리 빨래가 되고 싶은
마음들이 있다
막차를 타고 가리
떠난 막차는 다시 오지 않는다
킁킁대며 막차는 자꾸 온다
나도 막차다
볕 좋은 여름 오후
대청마루에 앉아 빨래를 개듯이
이 젖은 시간의 잔등이
식빵처럼 말라 부스러지기 전
삼육검정참깨두유가
알리는 저녁9시
가슴이 콩콩거리는 저녁콩새가
찬 강물 속을 거슬러 날고있네
지금은 고요한 콩의 숨소리를 듣는 시간
뿌리로부터
나희덕
한때 나는 뿌리의 신도였지만
이제는 뿌리보다 줄기를 믿는 편이다
줄기보다는 가지를,
가지보다는 가지에 매달린 잎을,
잎보다는 하염없이 지는 꽃잎을 믿는 편이다
희박해진다는 것
언제라도 흩날릴 준비가 되어있다는 것
뿌리로부터 멀어질수록
가지 끝의 이파리가 위태롭게 파닥이고
당신에게로 가는 길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한다
당신은 뿌리로부터 달아나는데 얼마나 걸렸는지?
뿌리로부터 달아나려는 정신의 행방을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허공의 손을 잡고 어딘가를 향해 가고 있다
뿌리 대신 뿔이라는 말은 어떤가
가늘고 뾰족해지는 감각의 촉수를 밀어올리면
감히 바람을 찢을 수 있을 것 같은데
무소의 뿔처럼 가벼워질 수 있을 것 같은데
우리는 뿌리로부터 온 존재들,
그러나 뿌리로부터 부단히 도망치는 발걸음들
오늘의 일용할 잎과 꽃이
천천히 시들고 마침내 입을 다무는 시간
한때 나는 뿌리의 신도였지만
이미 허공에서 길을 잃어버린 지 오래된 사람
두모포에 부치다
임희숙
두모포 나루터에 나가 늙은 나무를 만났다
수백 년을 누워보지 못한 나무의 곤함과 절절함이
새로 돋는 잎사귀에도 묻어 있다
나무의 껍질 여기저기 박혀 있는 수천수만의 눈빛이 부셔
속을 감히 들여다볼 수 없었다
눈빛은 저녁 무렵이 되어서야 다소곳해졌다
배를 묶었던 옆구리에 엉킨 피고름은
제법 노목의 옹이처럼 명예로웠다
뱃놀이를 하던 독서당의 서생들이
멀미인지 술독인지 게워놓은 무늬들이
산수화처럼 그려진 강가
동호대교를 지나는 열차바퀴 소리가 생생하다
늦은 햇살에 나룻배를 타고 압구정으로 떠났다
멀리 봉은사에서 저녁 범종 소리가 들렸다
강물을 쓸고 지나는 바람에 끼쳐오는 비린 속내
돌아보니 한 남자가 나무의 가슴에 손을 얹고 서 있었다
배를 놓친 사람의 풍경이 아름다웠지만
카메라 뷰파인더 안에는 오래된 나무만 보였다
세월처럼 천천히 물살처럼 깊게
어부의 배를 따라 3호선 열차가 저녁 강을 건너고 있다
가운뎃손가락
김다희
무를 써는데 가운뎃손가락이
칼 밑을 기웃거린다
반의 반치쯤 물러서도 좋으련만
자꾸 겁 없이 대든다
그 모습이 다섯 남매의
가운데인 나를 보는 것 같다
제일 먼저 대드는 것도 나였고
제일 먼저 눈물 흘리는 것도 나였다
한두 해 터울로 다섯을 둔 어머니
그때마다 이마에 가늘게 썬 무 채가
시나브로 시나브로 늘어났다
살면서 어머니 이마에
눈물 밴 밭고랑을 만들기도 했지만
다섯의 중심을 지탱하는 것도 나였다
어머니의 주름살 속에 숨은
상처난 가운뎃손가락을 본다
가운뎃손가락에 남은
상처의 그늘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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