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안 2011 겨울
평상
이재무
땀내 나는 가장을 벗고
헐렁한 건달로 갈아입는다
누워 부르던 노래들은
하늘로 올라가 별이 되었다
앉아 듣던 슬픔들은
기꺼이 생의 거름 되어주었고
엎드려 읽고 쓰던 말들은
나무와 꽃이 되었다
안방에서 엄하시던 아버지도
더러 농을 거셨고
부엌에서 근심 잦던 엄니도
활짝 웃곤 하였다
졸음 고인 눈두덩 굴러
머리맡에 낙과처럼 떨어지던
저녁 종소리 우련하다
묵화 이불
황동규
2011년1월16일, 일, 마냥 맑음.
서울 최저기온 영하 17.8도, 낮 영하 10도
눈 속을 한없이 걷는 것처럼 오전을 보냄.
차 등에 덮인 눈 쓸어주려 나가보니
연고처럼 살에 달라붙는 추위.
베란다 화분들에게 거실 문 좀 더 열어주고
가벼운 추위 속에서 가볍게 책을 읽음. 문득
나도 모르게 거실 마룻바닥에 깔리는
건너편 동과 동 사이 나무들의 성기고 묽은 그림자와
베란다 난들의 짙은 실루엣이 만나 실시간으로 만드는
긴 네모꼴 묵화.
겨울해가 건너편 동 뒤로 넘어가며 거실 빛을 거두고
조금 후 동과 동 사이를 건너가며 깔리기 시작해서
십여분 후에는 언제 그런 게 있었냐는 듯 사라지는
그림자 무늬가 제대로 깔리는 건
겨울 가운데도 지금 바로 이때,
마룻바닥 한가운데 잠시 이불처럼 덮였다 벗겨지는 묵화.
그 속에 들어가 몸을 눕혀 본다.
내 몸의 넓이와 길이와 얼추 맞는다.
이곳에서 스무 몇 겨울을 살아내면서
묵화 이불 속에 들어온 건 이게 처음이지?
느낌과 상관없이 ‘따스하다’고 속삭인다.
벌레처럼 꿈틀거려본다.
지금까지 바른 느낌과 따스한 느낌 가운데 하나를 고르라면
늘 바른 느낌이 윗길이라고 생각하며 살아왔지만
이 허전한 따스함이
남은 삶을 군불처럼 뎁혀 주는구나.
은알
정일근
은현리 은하마을에서 날달걀처럼 동글동글 늙어가는 할머니 몇 분 하얀 앉은뱅이 꽃처럼 주저앉아 마을이름을 묻는 나그네에게 이가 다 빠진 쭈글쭈글한 입으로 오물오물 은알, 은알이라고 중얼거린다
알에서 태어나 알에서 사는 사람들이 낡고 오래된 은수저 색깔 같은, 노란자는 이미 삭은 편안한 은알로 돌아가는 중이다
감정 노동
박정대
오늘은 감정을 노동하였다
하루 종일 비가 내려 집의 외벽들이 젖어가는데 나는 배고픈 짐승처럼 집의 내장에 웅크리고 앉아 무한의 바람결을 뒤적이며 한 움큼의 슬픔을 노동하였다
세계의 뒷골목에서 우연히 마주친 코끼리 군은 흡혈귀가 쫓아온다고 마늘을 사러가는 중이었고 상강의 도린곁에서 만난 가엾은 모기 양은 사막화된 피부의 건천을 따라 유목민처럼 떠돌았다
감정은 그때마다 빗물을 따라 바다로 흘러갔지만 마음의 습지에 다시 한 모금의 물을 부으며 나는 새로 돋아나는 내면의 지도와 영토를 오래도록 생각하였다
침묵은 코끼리 군이 지나간 발자국마다 고이던 물웅덩이
고독은 모기 양이 점령한 곳으로부터 부풀어 오르던 한 점의 영토
오늘은 창문을 열고 하루 종일 감정을 노동하였다
떨어지는 빗방울을 시선의 어깨에 외투처럼 걸친 채 온종일 담배 연기로 유령하였다
내가 담배를 피울 때마다 담배 연기 속 소립자들은 머나먼 행성에 착륙한 우주선처럼 새로운 감정의 지도와 영토를 보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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