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청춘 2011 겨울
문 밖에서
곽경효
현관문을 열다 말고 멈칫거린다
반쯤 열린 문 안쪽 세상이 낯설다
가만히 집 안을 들여다 본다
닫혀 있던 공간이 만들어 내는 내밀한 무늬들이
수런거리며 일어선다
익숙한 일상의 뒷모습이 또 하나의 세계라는 것을
잠시 잊고 있었으니
보이는 것을 향해 손을 내밀었는데
허공이 먼저 다가온다
익숙하다는 것은 어쩌면 아무 곳에도 가 닿지 못하는 일
덫에 걸린 짐승처럼
마음이 자꾸만 바스락거린다
내 속의 오래된 나를 돌아본다
어느 날 문득 거울 속의 내가
나에게 물어올지도 모른다
아직 그쪽의 풍경은 괜찮은가
문을 열다 말고
문 밖에서 잠시 또 다른 세상과 겨루고 있는 사이
누군가 나를 열어놓고 사라진다
다시 하얗게
한영옥
어느 날은
긴 어둠의 밤을 가르며
기차 지나가는 소리, 영락없이
비 쏟는 소리 같았는데
또 어느 날은
긴 어둠의 밤 깔고
저벅대는 빗소리, 영락없이
기차 들어오는 소리 같았는데
그 밤기차에서도 당신은 내리지 않으셨고
그 밤비 속에서도
당신은 쏟아지지 않으셨고
뛰쳐나가 우두커니 섰던 정거장엔
얼굴 익힌 바람만 쏴하였습니다
다시 하얗게 칠해지곤 하는 날들
맥없이 눈이 부시기도 하고
우물우물 밥이 넘어가기도 했습니다
등신
김세형
사람들의 등이 절벽인 때가 있다
그 절벽 앞에 절망하여 면벽하고 있을 때가 있다
아주 오래토록 절벽 앞에 면벽하고 있어 본 사람은 안다
그 절벽이 얼마나 눈부신 슬픔의 폭포수로 쏟아지는
짐승의 등인가를… 그리고 마침내는 왜?
그 막막한 절벽을 사랑할 수밖에는 없는가를…
자신에게 등을 돌리고 앉아 있는 이의 등 뒤에 앉아
오래토록 말이 없이 면벽해 본 사람은 안다
난 그렇게 절벽 앞에서 묵언정진 해왔다
내게 등 돌린 사람만을 그렇게 사랑하곤 했다
난 내게 등 돌린 이의 등만을 사랑한 등신이었다
사랑에 있어서 난 산의 경지에 오른 등신이었다
아침 포구
김진길
밤 사이 그물을 끌던 달이 돌아와 눕는 시간
타악, 탁 생선칼이 빛을 한 입 베어 물고
미명의 포구 하나를 생선처럼 발라낸다.
바닷물이 차오를 때 잠시 맞은 생의 만조
허기 속 포만감이 썰물로 빠진 자리
비릿한 어물전 중천 젖은 해가 다시 뜬다.
타관 땅 밑바닥을 휘청이며 걸어오듯
해저 어느 수역을 훑어온 쌍끌이 달
뱃사내 부풀다 이운 꿈마다 달무리 진다.
현기로 몸서리치다 회항한 하현처럼
은하를 건너온 한 포구의 위성들
여기는 지상의 발치, 흥정이 파닥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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