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그림이다, 손철주/이주은, 문학동네, 2011(초판3쇄)
자고 나면 날마다 빈 화폭과 마주서는 자들은 고통 속에서 복되다. 빈 화폭은 귀순하지 않은 자유의 황무지이다. 그 화폭은 인간의 세상 속에 펼쳐져 있지만,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
고수가 북채를 들어서 북을 때릴 때, 그 첫 번째 북소리가 울리는 순간 이 광막한 시간은 인간이 주무를 수 있고, 인간이 가지고 놀 수 있는 새로운 시간으로 짜여진다. 미래의 시간 위에서만 악기를 연주할 수 있듯이, 미래의 공간 위에서만 그림을 그릴 수 있다.
낙원을 그린 절벽에 부딪쳐 죽은 자들은 신라 황룡사의 새들뿐 아니라 역사 속에 지천으로 널려있다.
품에 안을 수 없는 미인도를 그리는 이유
‘깊은 산 여름 장맛비를 맞으며 그대를 찾아갈 때, 종이와 먹물이 비에 젖어 못쓰게 될까 걱정했지요. 시를 쓰고 싶었지만 술에 취한 뒤 글씨를 쓰니 구름이 덩어리진 듯합니다. 바로 이 그림과 같으니 웃음거리외다.’
노인의 발치 아래가 절벽입니다. 노인은 얼굴을 바짝 치켜들고 저 멀리 내다봅니다. 표정에 외로움 따위는 뵈지 않지요. 예부터 이런 포즈를 일컬어 ‘백안간타세상인白眼看他世上人’이라 했습니다. ‘시덥잖은 눈빝으로 세상 사람들을 본다’는 뜻입니다.
벼슬을 매양하랴 옛 산에 돌아오니
구릉에 솔바람 더러운 내 입 다 씻었다
솔바람아, 세상 기별 오거든 불어 도로 보내라
당나라의 서예가 설직이 읊은 시 중에 ‘가을 아침에 거울을 보다’를 제가 자주 음송하는데요, 하도 처연해서 가슴이 저릿할 정돕니다.
나그네 마음은 낙엽에도 놀라는데
밤새 앉아 갈바람 소리를 들었지
아침이 되어 얼굴 수염을 봤더니
한 생애가 거울 속에 있었네
해서 안 될 말과 해서 안 될 짓이 술 때문에 튀어나오죠. 술의 신선이라는 이태백조차 탄식했습니다.
칼 뽑아 물을 베도 물은 다시 흐르고
술잔 들어 시름 씻어도 내내 시름겹네
“얼마나 따분한가, 멈춰서는 것, 끝내는 것, 닳지 않고 녹스는 것, 사용하지 않아 빛을 내지 못하는 것은.”
테니슨Alfred Tennyson, 1809-92
신은 인간을 샘낸다는 말을 들은 적 있어요. 현재를 느낄 수 있기 때문이래요. 신은 모든 것을 다 보니까 ‘지금now’이 없이 ‘항상-이미always-already’의 느낌으로 산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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