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도와 영토, 미셸 우엘벡, 문학동네, 2011(11)

 

 

 

 

 

 

 

 

 

 손자는 할아버지에게 일종의 부활이거나 복수다.

 

 

 

 더울 놀라운 것은 동시대인들이 대개 예수의 삶보다는 스파이더맨의 삶에 더 환한 데 비해, 그는 서구문명에 엄청난 족적을 남긴 가톨릭 교리에 친숙했다는 점이었다.

 

 

 

 충격을 받은 제드는 샌드위치 진열대 앞에서 몸을 떨기 시작했다. 그는 크뢰즈 지역과 오트 비엔 지역을 15만분의 1로 축소해놓은 이 미슐랭 지도만큼이나 훌륭하고 감동적이고 의미 있는 물건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지도 속에는 세계에 대한 과학적 기술적 이해와 모더니티의 본질이 동물적 삶의 본질과 한데 섞여 있었다. 색깔로 구분되는 약호만 사용한 그림은 복잡하고 아름다웠으며, 완전무결한 명료함을 지니고 있었다. 중요도에 따라 달리 표시된 각각의 마을과 촌락들에서 수십, 수백여 생명과 영혼들의 맥박 소리와 함성이 들리는 듯했다. 그중 어떤 영혼들에게는 천형이, 어떤 영혼들에게는 영생이 약속되어 있을 터였다.

 

 

 

 여섯 바퀴째 도는 중에 그녀가 다시 눈에 띄었다. 샴페인 잔을 들고서 미소 띤 얼굴로 작은 무리에 섞여 있었다. 남자들이 숨기려고도 하지 않고 탐욕스런 시선으로 그녀를 들이마시고 있었다.

 

 

 

 저는 저라는 사람을 무엇보다도 시청자로 규정합니다!” 제드가 분위기에 휩쓸려 기세 좋게 선언하자 올가가 놀란 눈으로 바라보았다.

 

 

 

 사랑이 초기단계일 때, 사람들은 대개 앞으로 닥칠 힘든 날들과 나아가 이별의 위기를 극복하게 해줄 아름다운 추억을 만들어 간직하겠다는 희망으로 여행지의 모든 것에 감탄하기 일쑤다. 그들 커플은 모든 숙박업 및 요식업 종사자들에게 이상적인 고객의 전형이었다.

 

 

 

 왜 그만두지 않으세요?” 제드가 묻자 아버지는 무슨 소리냐는 표정으로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돈은 벌 만큼 버셨잖아요. 이제 그만 은퇴해서 인생을 즐기셔도 되지 않아요?” 아버지는 제드의 말을 듣지 못했거나 아니면 그 의미를 파악하지 못한 것처럼 아들을 뚫어져라 바라보다가 적어도 일 분여가 흐른 후에야, 비로소 되물었다. “그럼 나보고 뭘 하란 거냐?” 아버지의 목소리는 길 잃은 아이의 목소리 같았다.

 

 

 

 사랑은, 드문 겁니다. 모르세요? 아무도 말해주지 않던가요?

 

 

 

 12월 말이 내가 가장 좋아하는 시기요. 오후 네시면 해가 떨어지거든. 해가 떨어지면 잠옷을 입고 수면제를 털어넣은 다음 와인이랑 책을 가지고 침대에 들지요. 벌써 몇 년 째 그렇게 살아오고 있소. 아홉시에 해가 뜨면 일어나서 씻고 커피를 마시고, 그러다 얼추 정오가 되면 그다음엔 네 시간만 견디며 되는 거요.

 

 

 

 여하튼 집에 그림을 걸어둘 벽은 많으니까. 벽이야말로 인생에서 정말 내가 가진 유일한 거요.”

 

 

 

 울엘벡은 소설가로서의 이력을 반추하며 그에게 이런 말을 했었다. 늘 메모하고 문장들을 늘어놓아볼 수는 있지만, 소설을 쓰려면 이 모든 것이 촘촘해지고 논박의 여지가 없게 될 때까지, 필연이라는 진정한 핵이 나타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고. 그러면서 소설은 절대 소설가 마음대로 쓸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덧붙였다. 그에 따르면 책은 굳기를 스스로 결정하는 콘크리트 블록과도 같아서, 작가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그저 거기 그렇게 존재하며 무기력한 번민 속에서 책이 저절로 시작되기를 기다리는 것뿐이다.

 

 

 

 그는 그들을 지나쳐, 거실 안으로 거리낌 없이, 그럼에도 불안한 마음으로 들어서며 뇌까렸다. “나는 법의 살아 있는 몸통이다.”

 

 

 

 나는 법의 몸통이다. 도덕의 불완전한 몸통이다.” 자슬랭은 이미 시야에 들어오고 만 장면을 정식으로 다시 들여다보기 전에 다소 주문 같은 말을 되뇌었다.

 

 

 

 일년 전, 범죄 현장을 견디는 데 어려움을 느끼기 시작한 그는 파리의 동쪽 끝 뱅센 숲속에 있는 불교사원을 찾아가 시신 옆에서 명상하는 부정관不淨觀*’을 수련하겠다고 했었다.

 

l  시신이 부패하는 과정을 지켜보며 육신의 덧없음을 깨우치고 탐욕을 없애는 수행법.

 

 

 

 확실히 개는 일종의 어린아이다. 보다 순종적이고, 유순하고, 평생을 분별력 있는 나이에 머무르다가, 대개는 부모보다 먼저 세상을 떠나는 어린아이.

 

 

 

 가톨릭은 죽음에 대해 무언가 할 말이 있었다. 하지만 사랑에 대해서도 그런지는 의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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