깡패단의 방문, 제니퍼 이건, 문학동네, 2012(초판인쇄)
사샤는 쪽지를 펼쳤고, 뭉뚝한 연필로 쓴 나는 당신을 믿습니다, 라는 글귀가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그대로 얼어붙은 채 그 문장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마치 그 문장이 나달나달한 쪽지에서 그녀를 향해 터널 하나를 뚫은 느낌이었다.
사샤는 평범하기 짝이 없는 검은 가방을, 지난 십이 년 동안 파일이든 전화번호든 쪽지든 베니가 필요로 하는 것은 뭐든 꺼내줬던 볼품없는 소원의 우물을 챙겼다.
롤프와 같이 쓰는 옆 텐트 안에서 찰리는 들을 수 있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들이 내는 소리가 아니라 움직임을.
열 한 살인 롤프는 자신에 관해서 두 가지를 확실히 안다. 그는 아버지의 것이고, 아버지는 그의 것이라는 것.
가끔 민디의 의견을 구하려고 이어폰을 건네기도 하는데, 음악이 – 오직 그녀의 – 귀청에 곧장 쏟아지는 경험은 매번 눈이 튀어나올 정도로 충격적이다. 홀로 음악을 듣는 그 상태, 음악이 주변을 황금빛 몽타주로 탈바꿈시키는 그 방식에 그녀는 마치 머나먼 미래에 루와 함께한, 아프리카에서의 즐거웠던 이 순간을 회고하는 기분이 든다.
“아야,” 루가 말한다. “가시가 아빠를 찌르는구나.” 검은색과 흰색이 섞인 호저의 가시다. 찰리가 구릉지대에서 발견해 핀 대신 머리를 틀어올리는 데 사용하고 있다. 아빠가 가시를 빼내자 황금빛 머리채가 산산이 부서지는 유리창처럼 그녀의 어깨 위로 쏟아져내린다.
병원에 와 있는 기분이다. 딱히 냄새 때문이 나이라(병원엔 카펫이 깔려 있지 않다), 고여 있는 공기 때문에, 모든 것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듯한 느낌 때문에.
오늘은 일진이 좋지 않다. 햇볕이 이빨처럼 피부에 박히는 날이다.
새카만 얼음을 깐 아이스링크가 떠올랐다.
눈을 들어 그를 본 나는 폭포수처럼 한꺼번에 쏟아져내리는 몇 가지 깨달음을 경험했다. 1) 베니와 나는 더 이상 친구가 아니고, 앞으로도 어림 없을 것이다. 2) 그는 잡음을 일으키지 않고 최대한 빨리 나를 내쫓을 방법을 궁리중이다. 3) 나는 이렇게 될 줄 이미 알고 있었다. 여기 도착하기 전부터 알고 있었다. 4) 바로 그런 이유로 그를 보러 여기에 온 것이다.
“내가 온 건 A와 B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고 싶어서야.”
베니는 내가 더 말하길 기다리는 것 같았다.
“A는 우리가 밴드를 하며 같은 여자를 쫓아다닐 때야. B는 지금이고.”
태양이, 크고 둥근 빛나는 태양이 천사가 고개를 드는 것처럼 떠올랐다. 지금껏 여기서 지켜본 일출 중 단연 가장 눈부셨다. 수면으로 은銀이 떨어져내렸다.
그러고는 한숨을 내쉬고 신음을 내뱉더니, 부축해주겠다는 그들의 손길을 뿌리치고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의자는 그를 놓아주며 작게 낑낑 소리를 냈다.
해시의 효과가 사라져가면서 네 머리가 있어야 할 자리에 보푸라기 가득한 상자만 남는다.
청바지와 부츠만 걸친 채 드루는 쓰레기와 물이 만나는 곳으로 천천히 나아간다. 돌출되어 있는 네모난 콘크리트 단으로, 애초에 그 용도도 잊힌 무언가의 토대로 만들어졌던 것이다. 그 위로 드루는 재빨리 올라간다. 그는 끈을 풀어 부츠를 벗고, 바지와 팬티도 벗어던진다. 두려운 와중에도 너는 남자가 옷을 벗는 행위의 아름다움과 무뚝뚝함에 어렴풋이 감탄한다.
테드는 침울한 성격에 예측 불허인 아들과 통화하기 위해 애써 기운을 냈다. “여어, 잘 있냐, 앨프!”
“아빠, 목소리 꾸밀 것 없어요.”
“무슨 목소리?”
“방금 그 ‘아빠’ 흉내내는 목소리요.”
그때 수전이 불쑥 그를 돌아보며 말했다. “우리 늘 오늘처럼만 살자.” 그 시절만 해도 두 사람이 한마음이었던지라 테드는 왜 아내가 그런 말을 하는지 더없이 잘 알았다. 그날 아침 섹스를 해서도, 점심식사 때 푸이 퓌세를 마셔서도 아니었다. 아내는 시간이 흘러가는 것을 느꼈던 것이다.
그것은 딱 얼굴만 봐도 홈페이지도 프로필도 닉네임도 휴대전화도 가져본 적이 없는, 다른 사람의 데이터의 일부가 된 적이 없는 남자, 오랜 세월 틈새 속에서 살며 잊힌 채 분기탱천했으나 어쩐 일인지 이제는 순수로 기명된 사나이, 그 훼손되지 않은 한 남자의 가슴에서 뜯겨나온 망상과 단절의 발라드였다.
'others'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해의 서 - 오쇼 라즈니쉬 (0) | 2012.06.23 |
---|---|
짐 오닐의 그로스 맵 - 짐 오닐 (0) | 2012.06.23 |
아이디어라이터 - 테레사 이에치 (0) | 2012.06.02 |
지도와 영토 - 미셸 우엘벡 (0) | 2012.05.28 |
문재인의 운명 - 문재인 (0) | 2012.05.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