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의 서, 오쇼 라즈니쉬, 판미동, 2009(1판1쇄)
무엇인가를 믿는 순간 그대는 이미 탐구를 중단한 것이다.
믿음은 인간의 지성을 마비시키는 가장 해로운 것 중 하나이다.
개혁이 실패하는 원인을 보면 참으로 이상하다. 모든 개혁은 개혁가들 자신에 의해 실패한다.
종교는 인간의 마음에 이원성을 심어 필연적으로 인간을 분열시킨다. 이것이 그들의 착취 방식이다.
중간에 위치한다는 것은 고정된 상태가 아니다. 그것은 유동적인 현상이다. 균형이란 명사가 아니라 동사에 가깝다.
연꽃은 물속에 있지만 물에 젖지 않는다.
자기만의 선한 목적에 따라 살인을 할 때에는 죄책감이 없어진다. 오히려 그는 선한 일을 했다고 생각한다.
사람들은 더 이상 그런 쓰레기들에 관심을 갖지 않는다. 설령 그들이 교회와 사원에 나간다 해도 거기엔 다른 이유가 있다. 종교가 아닌 사회적인 이유 때문이다. 교회에 모습을 보이면 존경받을 만한 사람으로 비친다. 그것은 로터리 클럽이나 라이온스 클럽에 나가는 것과 같다. 이 종교들은 그들만의 헛소리를 지껄이는 오래된 사교 클럽이다.
고타마 붓다가 진리를 깨달았다고 해도 그대가 그것을 확인할 방법은 없다. 그가 진짜로 진리를 깨달은 것인지 아닌지 어떻게 아는가? 그것을 알려면 그대 또한 진리를 알아야 한다. 그러면 그것을 감지할 능력이 생길 것이다. 그렇지 않은 한 그대는 그저 대중의 믿음을 따를 뿐이다. 가장 저급한 차원의 대중심리에 편승하고 있는 것이다.
위대한 서양 철학자 데이비드 흄David Hume은 여러 신비가들이 “너 자신을 알라.”고 말하는 소리를 듣고 이렇게 썼다.
“어느 날 나는 나 자신을 알려고 애썼다. 나는 눈을 감고 나의 내면으로 들어갔다. 거기엔 몇 가지 생각과 욕망, 추억, 꿈, 상상 등 이러저러한 것이 있었다. 하지만 그런 것들 외엔 거기엔 아무도 없었다. 나는 나 자신을 발견하지 못했다.”
고요한 마음이란 애초부터 불가능하다. 마음은 항상 생각과 걱정에 골몰한다. 이것은 자전거를 타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자전거를 타려면 계속 페달을 밟아야 한다. 페달을 멈추는 순간 넘어지고 만다. 마음도 이와 같다. 생각의 페달을 계속 밟아야만 마음이 존재할 수 있다.
지금 그대는 마음과 동일시되어 있다. 그대는 마음이 곧 ‘나’라고 생각한다. 여기에서 두려움이 싹튼다. 마음과 그대가 같은 것이라면, 마음이 멈추는 순간 그대는 사라지기 때문이다. 마음이 사라지면 그대 또한 더 이상 존재하지 못한다.
그대는 마음을 넘어선 어떤 것도 알지 못한다. 마음이 전부이다. 그러나 그대는 마음이 아니다. 이것이 진실이다.
예를 들어 분노를 관찰해 보라. 몇 분간만 관찰하면 분노가 사라진다. 성적 충동을 느낄 때에 주의 깊게 그것을 주시해 보라. 곧 그 충동이 사라질 것이다.
서서히 그대는 사념에서 벗어나기 시작한다. 이것이 주시와 관찰의 과정에서 나타나는 현상이다. 조지 구제프George Gurdjeff는 이것을 다른 말로 ‘비동일시non-identification’라고 불렀다.
자신의 문제가 아닌 것에 대해서는 누구든지 쉽게 조언하고 해결책을 제시할 수 있다. 어려움에 처해 있는 다른 사람들 앞에서 그대는 항상 현명한 조언자가 된다. 그러나 막상 자신에게 문제가 닥치면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른다. 어찌된 일인가? 그대가 문제에 연루되었기 때문이다.
신을 믿는다는 것은, 인간이 자신의 존재 이유를 모른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그는 자신이 왜 여기에 있는지 모른다. 신이라는 개념은 인간이 절망에 빠져있음을 보여준다.
기독교인들은 예수의 환영을 보고, 힌두교인들은 크리슈나의 환영을 본다. 힌두교인이 예수의 환영을 보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힌두교인에게 예수는 절대로 나타나지 않는다. 실수라도 그런 일은 없다. 반면에 기독교인들에게 크리슈나는 절대 나타나지 않는다.
어떤 사람이 그대를 모욕했다고 하자. 그가 스위치를 누르면 그대는 반응한다. 그대는 화를 내면서 상대방에게 덤벼든다. 이것을 진정한 행동이라고 할 수 있는가? 그것은 반응이지 행동이 아니다. 상대방이 그대를 조종하고, 그대는 그가 조종하는 대로 움직인다. 상대방이 스위치를 누르면 그대는 기계처럼 작동하기 시작한다.
누군가 그대를 치켜세우면 그대는 에고가 한껏 부풀어 올라 날아갈듯이 기분이 좋아진다. 그러다가 다른 사람이 와서 에고를 건드리면 한순간에 바닥까지 추락한다. 그대는 그대 자신의 주인이 아니다. 누구나 그대를 모욕할 수 있고, 슬프게 만들 수 있다. 누구나 그대를 화나게 하고, 폭력적으로 만들고, 미치광이 상태로 몰아갈 수 있다… 알렉산더 대왕보다 더 위대한 인물로 착각하게 만들 수 있다.
마르틴 하이데거Martin Heidegger는 이렇게 말한다.
“삶의 무의미함을 자각하면 큰 불안과 고뇌가 일어난다. 오랜 세월 유지되어온 순응과 세뇌의 틀이 무너지면서 이런 일이 일어난다. 일단 이런 해방이 일어나면 누군가에 의해 주어진 규칙에 따르지 않고 행동할 수 있다. 이제 인간은 자기 자신과 직면해야 한다.”
목욕을 할 때에는 목욕하는 순간으로 돌아오라. 식사를 할 때에는 식사를 하는 순간으로 돌아오라. 산보를 할 때에는 산보하는 순간으로 돌아오라. 지금 여기에 있지 못하다고 느끼는 순간 즉시 돌아오라. 그저 돌아오면 그 뿐이다. 죄책감을 갖지 말라. 죄책감을 가지면 핵심을 놓친다.
섣불리 이해하려 들지 말고 먼저 명상하라. 춤추고 노래하고 명상하라. 마음이 가라앉도록 놔두어라. 마음의 흙탕물이 깨끗하게 맑아지기를 기다려라. 그때 비로소 내가 말하는 ‘이해’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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