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의 운명, 문재인, 가교출판, 2011(초판11쇄)
대선을 치르던 2002년, 나는 부산 선거대책본부장을 맡았다. 부산 선대본부 출범식에서 노후보가 후보 연설을 하면서 그 표현을 쓰셨다. “사람은 친구를 보면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다고 하지 않습니까. 노무현의 친구 문재인이 아니고 문재인의 친구 노무현입니다” 이렇게 인사를 했다.
시대는 점점 암울해졌다. 1학년 때, 박정희 정권이 10월 유신을 선포했다. 3선 개헌으로 집권을 연장한 것으로도 모자라, 아예 영구집권을 하려는 것이었다. 전날 밤 탱크들이 시내를 질주했다. 다음날 아침엔 대학마다 탱크가 진주해 있었고, 유신 선포와 동시에 무기 휴교령이 내려졌다. 대학생들은 강의실 대신 술집이나 하숙집에서 모여 시국을 개탄했고 울분을 토했다.
10월 유신은, 법대생에게는 더더욱 황당한 일이었다. 유신헌법이 만들어지자 기존의 법전과 교과서들이 무용지물이 돼버렸다. ‘그래도 법학이 과연 학문이라고 할 수 있는가’, ‘법학이 과연 학문인가’라는 회의가 법대생들을 짓눌렀다.
헌법 교수의 첫 강의가 오래 기억에 남아있다. 당시 꽤 유명한 헌법학자였던 그 분은 자신이 쓴 헌법학 책을 강의 교재로 썼는데, 휴교기간 동안 유신헌법 책을 새로 쓰고 새 책으로 강의를 했다.
100분 강의 내내 학생들을 바라보지 못하고, 교실 천장만 바라보면서 강의했다. 유신헌법 책을 쓰고 유신헌법 강의를 할 수밖에 없는 부끄러움을 제자들에게 그렇게 표현한 것이다.
베트남에서 독재정권에 저항하는 승려들의 분신 소식이 이어졌다. 그런 투쟁까지 가야만 유신정권을 깨뜨릴 수 있을 것 아니냐는 말까지 나돌았다. 1975년4월 서울대 농대 김상진 열사의 할복은 그런 분위기가 현실로 나타난 것이었다.
“흔히 임기 후반부를 하산에 비유합니다. 저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참여정부에 하산은 없습니다. 끝없이 위를 향해 오르다가 임기 마지막 날 마침내 멈춰선 정상이 우리가 가야 할 코스입니다.” 직원들은 실제 그런 마음으로 퇴임 일까지 일을 해줬다고 생각한다.
당일 걸어서 노란 선을 넘는 대통령 내외분의 모습은 대단히 인상적이었다. 대통령은 그 선 앞에서 소감을 말했다. “저는 이번에 대통령으로서 이 금단의 선을 넘어갑니다. 제가 다녀오면 또 더 많은 사람들이 다녀오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마침내 이 금단의 선도 점차 지워질 것입니다.”
대통령은 또 이런 강조를 했다. “대선에서 질 수도 있다. 이기면 좋지만 늘 이길 수는 없는 것 아닌가. 그러나 패배하면 패배하는 대로 다음에 대한 희망을 남기는 패배를 해야 한다. 그러려면 대의나 원칙을 지키면서 대선에 임해야 한다. 특히 명분을 버리면 안 된다. 대의도 원칙도 명분도 다 버리고 선거에 임하면 이기기도 어렵고, 패배 후의 희망까지 잃게 된다.”
대통령은 어쩌다 그런 곤경에 처하게 됐을까. 나는 대통령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는 가난했다. 가난이 그를 공부에 매달리게 했고, 가난이 그를 인권변호사의 길로 이끌었다. 그가 가난하지 않았다면, 자신처럼 힘들었던 사람들에게 관심을 갖지 않았을지 모른다. 가난하고 억눌린 사람들을 돕겠다고 소박하게 시작한 일이 인권변호사였고, 민주화운동이었다. 정치는 그 연장선상에 있었다. 정치에 대한 그의 진정성이 그를 대통령까지 만들었다.
그래도 여전히 그 자신은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처음에는 변호사 하면서 가난에서 겨우 벗어났지만, 다른 가난하고 억울한 사람을 돕는 삶으로 빠져들면서 자신은 도로 가난해졌다. 봉하마을은 외진 고시어서 땅값이 엄청 싼데도 사저 건축비용이 없어 은행 대출을 받았다. 박연차 회장으로부터 돈도 빌리게 됐다. 대통령은 나에게 “내 자신만 정치적으로 단련되었지, 가족들을 정치적으로 단련시키지 못한 것을 후회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결국은 대통령에게 퇴임 이후의 대책이 따로 마련돼 있지 않았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다. 노 대통령 서거 후 상속신고를 하면서 보니 부채가 재산보다4억 원 가량 더 많았다.
23일 새벽 집을 나서, 그 먼 길을 떠나셨다.
언제부터였을까. 홈페이지에 “여러분은 나를 버리셔야 합니다”라는 글을 올리셨는데도 나는 대통령의 마음을 다 헤아리지 못했다.
김대중 대통령은 정부 측의 거부로 영결식에서 추모사를 할 수 없게 되자, 영결식 전날 불편한 몸으로 휠체어를 타고 서울역 분향소를 방문해 추모 말씀을 하셨다. 그 뿐 아니었다. ‘오마이뉴스’ 오연호 대표가 『노무현, 마지막 인터뷰』라는 책을 낼 때, 영결식장에서 하지 못한 마음의 추모사를 추천사로 써 주시기까지 했다. “노무현 당신, 죽어도 죽지 마십시오”로 시작해서 “우리가 깨어 있으면 노무현 전 대통령은 죽어도 죽지 않습니다”로 끝나는 간절한 추모사였다.
50만 명이 넘는 인파가 노제를 함께 했다. 모두들 무대에 집중해 함께 노래 부르고, 함께 소리치고, 함께 울었다. 나는 우느라 정신이 없어서 무대에서 뭐가 진행되고 있는지조차 몰랐다. 그냥 분위기만 함께 느낄 뿐이었다.
두 번째는 2005년, 조계종 총무원장이셨던 법장 스님 영결식 때였다…. 입적 하실 때 다비식으로 시신을 화장하는 불교의식과 달리, ‘생명 나눔 운동’으로 ‘시신 기부’를 해 국민들에게 큰 감동을 줬다. 게다가 “나에게 바랑이 하나 있는데 입도 없고 밑도 없다. 담아도 담아도 넘치지 않고, 주어도 주어디 비지 않는다”는, 열반송 대신 남긴 글이 사람들 입에 회자되면서 감동을 더해줬다.
1주기 추모행사에서 배우 명계남씨는 오열하며 절규했다. “그냥 살아계시지.” 그렇다. 같은 생각이다.
사실 ‘인권변호사’란 말은 적합한 표현이 아니다. 모든 변호사의 기본 사명이 인권옹호이기 때문이다. 변호사법도 그렇게 천명하고 있다. 그러나 독재 권력의 서슬 퍼런 엄혹한 현실 속에서 그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어쩔 수 없이 소수의 변호사가 그 일을 맡게 됐고, ‘인권변호사’란 특별한 호칭으로 불리게 됐다.
어릴 적 가난의 기억은 살아가면서 그대로 인생의 교훈이 됐다. 더 이상 가난하고 싶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혼자 잘 살고 싶지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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