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상처는 돌 너의 상처는 꽃, 류시화, 문학의숲, 2012(128)

 

 

 

 

 

 

 

반딧불이

 

 

어머니에게 인사를 시키려고

당신을 처음 고향 마을에 데리고 간 날

밤의 마당에 서 있을 때

반딧불이 하나가

당신 이마에 날아와 앉았지

 

그때 나는 가난한 문학청년

나 자신도 이해 못할 난해한 시 몇 편과

머뭇거림과

그 반딧불이밖에는

줄 것이 없었지

 

너무나 아름답다고,

두 눈을 반짝이며 말해 줘서

그것이 고마웠지

어머니는 햇감자밖에 내놓지 못했지만

반딧불이로 별을 대신할 수는 없었지만

 

내가 자란 고향에서는

반딧불이가 사람에게 날아와 앉곤 했지

그리고 당신 이마에도

그래서 지금 그 얼굴은 희미해도

그 이마만은

환하게 기억 속에 남아 있지

 

 

 

 

 

 

 

모란의 연

 

 

어느 생에선가 내가

몇 번이나

당신 집 앞까지 갔다가 그냥 돌아선 것을

이 모란이 안다

겹겹의 꽃잎마다 머뭇거림이

머물러 있다

 

당신은 본 적 없겠지만

가끔 내 심장은 바닥에 떨어진

모란의 붉은 잎이다

돌 위에 흩어져서도 사흘은 더

눈이 아픈

 

우리 둘만이 아는 봄은

어디에 있는가

아무것도 아닌 것에 대한 소란으로부터

멀리 있는

 

어느 생에선가 내가

당신으로 인해 스무 날 하고도 몇 날

불탄 적이 있다는 것을

이 모란이 안다

불면의 불로 봄과 작별했다는 것을

 

 

 

 

 

 

 

 

 

 

 

 

직박구리의 죽음

 

 

오늘 나는 인간에 대해 생각한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가령 옆집에 사는 다운증후군 아이는 인간으로서

어떤 결격사유가 있는가

그날은 그해의 가장 추운 날이었다

겨울이었고

대문 두드리는 소리에 밖으로 나가 보니

그 아이가 서 있었다

죽은 새 한 마리를 손에 들고

 

늘 집에 갇혀 지내는 아이가 어디서

직박구리를 발견했는지는 모른다

새는 이미 굳어 있었고 얼어 있었다

아이는 어눌한 목소리로 부탁했다

뜰에다 새를 묻어 달라고

자기 집에는 그럴 만한 장소가 없다고

 

그리고 아이는 떠났다 경직된

새와 나를 남겨 두고 독백처럼

눈발이 날리고

아무리 작은 새라도 언 땅을

파기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흰 서리가

땅속까지 파고들어 가 있었다

호미가 돌을 쳐도 불꽃이 일지 않았다

 

아이가 돌아온 것은 그때였다

다시 대문 두드리는 소리가 났고

아이는 신발 한 짝을 내밀며 말했다

새가 춥지 않도록 그 안에 넣어서 묻어 달라고

한쪽 신발만 신은 채로

양말도 신지 않은 맨발을 하고서

새를 묻기도 전에 눈이 쌓였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이해하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인가

사랑하기 때문에 이해하는 것인가

무표정에 갇힌 격렬함

불완전함 속의 완전함

너무 오래 쓰고 있어서 진짜 얼굴이 되어 버린

가면

혹은, 날개가 아닌 팔이라서 날 수 없으나

껴안을 수 있음

 

 

 

 

 

 

 

 

화양연화

 

 

나는 너의 이마를 사랑했지

새들이 탐내는 이마

이제 막 태어난 돌 같은 이마

언젠가 한 번은 내 이마였던 것 같은 이마

가끔 고독에 잠기는 이마

불을 끄면 소멸하는 이마

 

스물두 살의 봄이었지

새들의 비밀 속에

내가 너를 찾아낸 것은

책을 쌓아 놓으면 둘이 누울 공간도 없이

거의 포개져 자다시피 한 오월

내 심장은 자주 너의 피로 뛰었지

나비들과 함께 날들을 세며

 

다락방 딸린 방을 얻은 날

세상을 손에 넣은 줄 알았지

넓은 방을 두고 그 다락방에 누워

시를 쓰고 사랑을 나누었지

슬픔이 밀려온 밤이면

조용한 몸짓으로 껴안았지

 

어느 날 나는 정신에 문제가 찾아와

하루에도 여러 번 죽고 싶다, 죽고 싶다고

다락방 벽에 썼지

너는 눈물로 그것을 지우며

나를 일으켜 세웠지

난해한 시처럼 닫혀 버린 존재를

 

내가 누구인지 나보다 더 잘 아는 사람은

너밖에 없었지

훗날 인생에서 우연히 명성을 얻고

자유로이 여러 나라를 돌아다녔지만

그때가 나의 화양연화였지

다락방 어둠 속에서 달처럼 희게 빛나던

그 이마만이 기억에 남아 있어도

 

 

 

 

 

 

 

 

 

일곱 편의 하이쿠

 

 

같은 눈송이를 바라보는

이 아침

서로 다른 이불 속에서 잤을지라도

 

 

 

고드름 따다 주자

아내 얼굴에 잠시 병색이 가셨다

내 손은 울고

 

 

 

비가 오니까 이 웅덩이도

예쁘구나

여름 내내 마르더니

 

 

 

요절하지 못했으므로

계속 쓰는 겨울밤

시인에게 이만한 형벌이 없다

 

 

 

순백의 눈도

하루 만에

세상의 때가 묻는구나

 

 

 

신의 얼굴을 한 풀벌레조차

말더듬이는

짝을 얻지 못하네

 

 

 

한 살이든 스무 살이든 백 살이든

앞다퉈 핀다

이 산수유

 

 

 

 

 

 

 

 

 

 

 

꽃잎 하나가 날려도 봄이 줄어든다

 

* 한 조각 꽃잎이 날려도 봄빛이 깎인다 (一片花飛減却春) – 두보 <곡강曲江>

 

 

 

 

 

 

 

이런 시를 쓴 걸 보니 누구를 그 무렵 사랑했었나 보다

 

 

꽃눈 틔워 겨울의 종지부를 찍는

산수유 아래서

애인아, 슬픔을 겨우 끝맺자

비탈밭 이랑마다 새겨진 우리 부주의한 발자국을 덮자

아이 낳을 수 없어 모란을 낳던

고독한 사랑 마침표를 찍자

잠깐 봄을 폐쇄시키자

이 생에 있으면서도 전생에 있는 것 같았던

지난겨울에 대해 나는 아무 할 말이 없다

가끔 눈 녹아 길이 질었다는 것 외에는

너는 나에게 상처를 주지만 나는 너에게 꽃을 준다, 삶이여

나의 상처는 돌이지만 너의 상처는 꽃이기를, 사랑이여

삶이라는 것이 언제 정말 우리의 것이었던 적이 있는가

우리에게 얼굴을 만들어 주고

그 얼굴을 마모시키는 삶

잘 가라, 곁방살이하던 애인아

종이 가면을 쓰고 울던 사랑아

그리움이 다할 때까지 살지는 말자

그리움이 끝날 때까지 만나지는 말자

사람은 살아서 작별해야 한다

우리 나머지 생을 일단 접자

나중에 다시 펴는 한이 있더라도

이제는 벼랑에서 혼자 피었다

혼자 지는 꽃이다

* ‘삶이라는 것이 언제~ 마모시키는 삶’ – 옥타비오 빠스 <태양의 돌>에서

 

 

 

 

 

 

순록으로 기억하다

 

 

내가 시인이라는 걸 알고 어떤 이가

툰드라의 순록에 관한 시를 써 보라고 했다

가축화되기 전에 순록은 야생으로 무리 지어 먼 거리를 이동했는데

소금이 필요할 때면 어쩔 수 없이

인간의 천막으로 다가왔다

이때 다른 무리들은 모두 소금을 받아먹어도

한 마리 순록만은 먹기를 거부하며 서 있었다고 한다

인간들에게 소금을 제공받는 대신

그 순록은 나머지 족속들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기로 결정하고

그 자리에 나와

의연하게 서 있었던 것이다

그것이 인간과 순록들 사이 무언의 약속이었다

순록의 무리는 그럼으로써 인간에게 종속되지 않을 수 있었다

소금 바람 속에 서 있어 본다

그 순록으로 기억하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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