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 사사키 아타루, 자음과모음, 2013(초판4쇄)
성별도 나이도 직업도 전혀 다른 몇 사람으로부터 똑같은 질문을 받고 좀 당황했습니다. 당신은 홀연히 나타났는데 지금까지 어디서 뭘 하고 있었느냐고 말입니다.
이것은 답하기에 참 난처한 질문입니다. 살고 있었다고 밖에 말할 수 없습니다.
누구의 부하도 되지 않았고 누구도 부하로 두지 않았다
이제 막 시단에 새로이 등장한 폴 발레리가 스승으로 우러러보던 스테판 말라르메에게 시작詩作의 충고를 구하는 편지를 쓴 적이 있습니다. 말라르메는 어떻게 답장을 썼을까요? "유일한 참된 충고자, 고독이 하는 말을 듣도록"이라는 것이었습니다.
현재를 좇는 자는 언젠가 현재에 따라 잡힌다.
그의 책을 읽었다기 보다는 읽고 말았습니다. 거기에 그렇게 쓰여있는 이상, 그 한 행이 아무래도 옳다고밖에 생각되지 않은 이상, 그 문구가 하얀 표면에 반짝반짝 검게 빛나 보이고 만 이상, 그 말에 이끌려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니체 왈, "자신이나 자신의 작품을 지루하다고 느끼게 할 용기를 가지지 못한 사람은 예술가든 학자든 하여튼 일류는 아니다." 자, 우리는 이미 여기까지 왔으므로 이 한마디는 이해할 수 있겠지요. 알아버리면 미쳐버릴지도 모르는 정도의 것이 아니면 일류라고 부를 수 없습니다. 방어기제를 가동시키고, 따라서 기묘한 무료함이나 난해함을, '기분 나쁜 느낌'을 느끼게 하지 못하는 것은 책이라고 부를 수 없습니다. 그런데 거기까지 사람을 몰아넣지 않고 안이하게 진행된 책이 과연 읽을 가치가 있는 것인지 어떤지. 그런 책을 잃는 것보다는 카프카의 무의식에 자신의 무의식을 비춰보고 자신의 무의식과 함께 변혁시키는 위험한 모험을 시작하는 것이 훨씬 더 즐겁지 않을까요.
루터는 "설사 보름스 시내 지붕의 기와가 모두 적이 되어 습격해온다고 해도 나는 간다"라고 말하며 합스부르크 제국의 전성기를 창출한 황제 카를 5세가 기다리는 보름스 국회의 소환에 응합니다. 거기서 주장을 철회하라는 요구를 거절하고 이렇게 말합니다. 무척 유명한 대사인데 인용해 보겠습니다.
... 나, 여기에 선다. 나에게는 달리 어떻게 할 도리가 없다.
작가 고토 메이세이가 "왜 소설을 쓰는가?"라고 자문하고는 "소설을 읽어버렸으니까"라고, 사람을 무시하는 듯한 그 사람 특유의 넉살 좋고 이상한 느낌으로 답했습니다. 이는 사실 똑같은 일입니다. 읽어버린 것입니다. 그러므로 쓰는 것입니다.
읽어라, 어머니인 문맹의 고아여
자신이 하는 일을 종교라고 생각하는 종교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다
예를 들어 '법은 대체 어디에 있는가' 하는 단순한 물음조차 벌써 대답하기 어렵습니다. 이를테면 육법전서가 여기에 있다고 합시다. 하지만 물질로서의 '그것'에 법이 '있는'가, 법 자체의 실체가 '있는'가 하면, 이는 사실 무척 수상쩍습니다.
왜 계속 쓰는 걸까요? 계속 쓸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달리 할 일이라도 있습니까?
발터 벤야민이 말했습니다. "밤중에 계속 걸을 때 도움이 되는 것은 다리도 날개도 아닌 친구의 발소리다"라고요. 발소리를 들어버렸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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