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일기장, 박일호일기 박재동엮음, 돌베개, 2013(초판 1쇄)
병상에서 내가 손을 잡자 새근새근 잠이 들어, 아버지의 아기였던 나처럼 나의 아기가 되어 돌아가신 아버지. 나의 아버지.
더운 여름날 학교에서 돌아오면 어머니는 언제나 웃으시며 "재동아, 덥제? 수동아 덥제? 얼음 한 그릇 먹어라." 하고 갈아주셨어요. 빙수 기계 앞에서 어머니는 언제나 우리를 웃는 얼굴로 반겨주셨지요.
부모로서 자식들의 원대한 이상에 동조하고 싶지만 현실의 여건이 불가능하니 20대의 끓는 열정과는 타협하기 힘들다. 불가능은 없다는 젊은 세대와, 오랜 세파에 시달린 생활인과의 대화는 엇갈린다.
"어떻게 알았습니꺼?"하니 상석이가 비가 부슬부슬 오는데 헐레벌떡 먼길을 뛰어와서 "어머니, 합격했습니더!" 하길래 상석이가 합격한 줄 알고 "아이구, 축하한다." 했더니 "저 말고 재동이요." 하기에 "그럼, 너는?" 했더니 "저는 떨어졌습니더."하더라는 것이 아닙니까. 아아, 저라면 그럴 수 있었을까요. 제가 떨어졌어도 상석이는 또 뛰어와서 떨어진 저를 위로해줬을 겁니다.
나는 스물네 시간을 쪼개 쓸 만큼 바빴다. 하루에 달력이 서너 장씩 그렇게 넘어갔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언제 내 나이 50이 되나. 50이 되면 우리 아이들 교육도 거의 끝날 것이다. 그때까지는 지금처럼 살아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어머니의 신조는 '주부는 가정의 등불이다. 주부의 얼굴이 어두우면 온 가정이 어둡다' 였습니다.
둘째 수동이가 군에 입대할 날짜가 됐다. 귀엽게 생긴 모습에 까까머리를 하니 앳되고 귀여웠다. 입대할 날짜가 가까워올수록 걱정이 되었다. 군에 보내고 다들 면회를 가는데 나는 면회 갈 처지가 못 되었다. 면회 기다리지 말라는 말을 전해야 하는데 입밖에 내기가 어려워 망설였다. 작별인사를 할 때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수동아, 너는 면회 오라는 편지는 하지 마라." "응, 안할게." 하고 간다. 다시 돌아보니, 신고있던 슬리퍼를 신은 채 간다. 뒷모습이 보이지 않게 멀어지자 들어왔다. 그때 못난 어미의 심정, 무어라 표현할 수 없이 비참했다.
처음 우리 환경이 바뀌고 무일푼으로 새 삶을 시작할 때만 해도 천박한 풀빵 장사 내 꼴을 고향 사람들에게 보이지 않으려고 일가친지 하나 없는 부산 땅에서 모질게 살았는데, 결국은 고향땅에 와서 밀가루에 얼룩진 호떡 장사 초라한 내모습을 고향 사람들에게 보여주게 되었다.
매일 같은 생활이었다. 물건 주문하고 탄불 피우고 집 안팎 청소를 하며 하루 일과가 시작되었다. 아이 둘 학교에 보내고 장사를 시작했다. 학교 단속이 심해 장사가 잘 안 됐다. 잘될 때보다 안 될 때 훨씬 피곤했다. 온종일 설쳐도 수입은 기천 원. 병원도 학교도 돈 달라고 입을 벌리고 있어 애간장이 다 탔다. 의논할 상대도 없다. 또다시 모든 일이 얽히고설키고 정말 마음 붙일 곳이 없었다.
오늘 밤도 선잠을 깨서 내일 장사 준비로 차가운 손을 불면서 밀가루 반죽을 하는 아내의 투지는 나의 투병도 상대가 될 수 없다.
지금도 어머니는 그때 하루 세 시간밖에 못 자며 고생은 했어도 내 한 몸 꿈적거려 온 식구를 살릴 수 있다는 사실이 너무 신기하고 또 감사해서 피곤한 줄 몰랐다고 말씀하세요.
첫째 내외는 서울 신혼살림터로 새출발하러 떠났다. 선머슴아가 얻은 방이 어떠하랴. 여름이면 루핑으로 덮은 지붕이 불같이 더워서 견디기가 어렵다고 며늘아기 편지로 전해들었다. 세상 물정 모르는 남편과 새살림 꾸려가기가 힘드는 모양이었다. 자다가 물을 들통에 떠서 지붕에 뿌리고 잠을 청한다고 했다. 미안하고 마음이 아팠다.
나이가 들어가니 천덕꾸러기 내 몸도 자주 잔꾀를 부린다. 팔목이 아파 움직이기가 거북하다. 2~3일 한의원에 가서 침을 맞고 치료하니 조금 효험이 있는 듯 하나 이번에는 발목이 아프기 시작한다. 발목도 침을 맞기 시작했다. 남편은 쉬라고 하지만 우리 형편이 허락하지 않는다. 돈으로 생명을 이어가는 중환자 남편이기에 오래 같이 살려면 내 고통쯤은 참아야 한다. 며칠 있으면 여름방학이 오기에 그날이 오기 전에 한 푼이라도 더 벌어야 한다.
아침 일찍 일어나 청소하고, 팥 삶고, 팥빙수, 오뎅, 떡볶이, 만두, 도너츠 팔며 오며 가며 만화방 보며 아침에 우리들 밥 해먹이고, 도시락 싸주며 아버지는 특별한 음식 따로 해드리며, 그렇게 바빠 하루에 4시간 자기 힘든 그런 중에도 어머니는 우리 생일 때는 꼭 미역국 한 그릇 끓여주셨지요. 게다가 어머니가 싸준 도시락은 고급이었어요. 반드시 노랗고 동그란 보름달 같은 달걀이 밥 위에 놓여 있었지요. 막내 명이 담임선생이 우리집에 가정방문을 와보고 놀란 일도 있었잖아요. 명이는 옷 입음새나 도시락이나 모두 부잣집 딸 같았는데 집에 와보니 너무 달라서 놀랄 만도 했지요. 어머니는 우리들 기죽지 않게 하려고 일부러 도시락을 정성들여 쌌다고 하셨어요.
남편이 반평생 당신이 나를 뒷바라지해온 보답을 주지 못하고 이지경에 이르렀으니 아무리 부부라 할지라도 이 죄를 어이하나, 하며 손을 잡고 소리 내어 운다. 나는 나대로 내 목숨까지 걸고 한시도 잊지 않고 한결같은 마음으로 간호하고 뒷바라지해왔는데 회복의 기미가 보이지 않으니 안타까워서 울음이 복받친다. 30년간 참아왔던 울음을 이날 밤 다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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