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의 시대, 알랭 드 보통, 문학동네, 2015(1판 11쇄)
'인류의 절반이 매일 뉴스에 넋이 나가 있다'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언론을 통해 결코 접할 수 없는 헤드라인이다.
뉴스를 찾아 보는 건 귀에 조개껍데기를 갖다 대고 거기서 들리는 인류의 울부짖음에 압도당하는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계몽주의의 위대한 목표는 성취되었다. 이제 평균적인 시민들은 지구상 모든 국가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의 정보를 실시간으로 접한다. 하지만 우리는 또한 훨씬 놀라운 사실을 어쩔 수 없이 확인하게 된다. 아무도 그 사건들에 딱히 관심을 갖지 않는다는.
이때 언론의 표준적인 대응은 대중을 비난하는 것이다. 대중은 생각이 짧고, 종족 간 총격보다 (놀라운 차이로) 팝송에 더 관심을 기울인다고, 중앙아프리카에서 구루병과 말라리아에 시달리는 10만 명의 절망적인 어린이들보다 영국 귀족 집안의 일원으로 태어나는 아기 하나에 더 신경을 쓴다고 말이다.
하지만 이렇게 놀랄 정도로 관심도가 낮은 것이 전적으로 대중의 잘못은 아니라고 밝혀진다면? 시청자들과 독자들이 외국 땅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에 대해 크게 신경을 쓰지 않는 진짜 이유가 특별히 천박하거나 고약해서가 아니고, 사건 자체가 지루해서도 아니고, 다만 뉴스가 충분히 호소력 있는 방식으로 사건들을 보여주지 않기 때문이라면 어쩔 것인가?
대중은 사실 무지보다는 무관심으로 인해 고통받고 있다. 이제 외국에 대한 정보를 얻는 건 그리 어렵지 않다. 진짜 문제는 우리가 어떻게 하면 무언가에 진지한 관심을 갖게 도리 수 있느냐다.
그래서 나는 우간다로 갔다. 가보고 싶었기 때문이 아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정말 가고 싶지 않았는데 그러면서도 왜 가고 싶지 않은지 알고 싶었다.
셀러브리티 문화의 진짜 원인은 자기도취적인 얄팍함이 아니다. 진짜 이유는 친절함의 부족이다. 모두가 유명해지고 싶어하는 사회는, 근본적으로 (넓은 의미에서) 여러 정치적 이유로 인해 평범한 삶을 살면서는 품위에 대한 자연스러운 욕구를 충족할 수 없는 사회다.
우리는 단순히 감정대로 행동하는 것을 인간다운 것이라 생각하는 데 워낙 익숙해서, 가끔은 무덤덤한 상태를 유지하는 것 또한 인간이 필수적으로 획득해야 하는 능력이라는 통찰을 간과하기 십상이다.
우리는 (좀 모호한 느낌이지만) 그 레스토랑처럼 되고 싶어한다. '편안하고' '품위 있고' '유쾌하고' '단순함에 만족하고' '자연에 접촉하고' '타인과 맘 편히 함께할 수 있는' 레스토랑처럼 말이다.
외국에 나가는 것도 그저 색다른 경치를 보려는 것이 아니라 외부의 풍경이 내면의 풍경을 재조정하는 데 도움이 되리라는 희망을 품고 나가는 것이다.
자신을 성찰하기란 결코 쉽지 않다. 우리 안에는 내면 탐사라도 시작한다면 당장 밖으로 나가라고 협박해야 할 난감한 진실들이 수없이 많이 숨어 있다. 하지만 우리가 자기 내면을 들여다보길 정말 간절히 피하고자 하는 그때가 바로, 불편하지만 잠재력 있는 생생한 생각들을 배양하는 순간이다.
뉴스는 절대로 우리를 혼자 있게 내버려두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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