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가능, 조르주 바타유, 워크룸프레스, 2015(초판 3)

 

 

 

 

 

 나는 모든 관습을 비웃고, 가장 천박한 것에서 즐거움을 찾는다는 점에서 내 친구들과 다르다. 의뭉스러운 젊은이처럼, 노인네처럼 살아도 나는 부끄럽지 않다.

 

 

 

허공에 휘둘리는 빗자루처럼 행복하다.

 

 

 

 나는 완전연소(完全燃燒)의 조건하에서만 살고 싶다(그게 아니면 그저 존속하고 싶은 것일 게다).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딱히 존속을 고집할 생각이 없다 보니 저항할 힘이 내게서 빠져나가는 거다. 내가 불안에 허덕이며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은, 살고 싶은 마음이 없어서일 뿐이다.

 

 

 

 B가 감감무소식인 가운데, 나는 고주망태의 눈먼 길을 끝없이 걷는다. 그러다 보니, 나와 더불어 지구 전체가 그 길을 가는 것 같다.

 

 

 

 인생에서 나와 마주친 바로 그때부터 단 한 순간도 살기를 멈추지 않는, 이것저것 생각하기를, 일어나 씻기를, 혹은 잠자리에 들기를 중단치 않는 숱한 남자와 여자들, 결국에는 감당할 수 없는 껍데기만 남기고 떠날 이 세상으로부터 어떤 사고라든가 질병이 그들을 강제로 끄집어내지만 않는다면 말이지만.

 

 

 

 세계를 정의할 유일한 방법은 먼저 그것을 우리만의 척도로 환원한 다음, 그것이 정확히 우리의 척도를 벗어나 있음을 활짝 웃는 낯으로 재발견하는 데 있다. 기독교는 결국 진짜 존재하는 것을 폭로해준 셈이다, 무너지는 순간의 둑이 그 진정한 위력을 드러내듯이.

 

 

 

 나는 불행의 관념 속에 나를 가두지 않는다.

 

 

 

 선잠을 잤다. 처음에 그것은 취기와도 같았다. 잠이 들면서, 나는 세상의 견고함이 잠의 가벼움에 고개를 숙이고 들어가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허물어진 개미집 속의 개미처럼,

 

 

 

 문장 하나를 통해 틈입한 감정. 어떤 문장인지는 잊었다.

 

 

 

밤은 나의 나체

별들은 나의 치아

나는 죽은 자들 가운데 몸을 던진다

하얀 햇살 걸친 채.

 

 

 

죽음이 내 심장에 산다

왜소한 과부처럼

그것은 흐느껴 운다

 

 

 

 도박판은 덧없는 가능성의 장()에 내가 주사위처럼 내던져진 별빛 총총한 밤이다.

 

 

 

 자연을 초과하는 게임에서, 내가 자연을 뛰어넘느냐 자연이 나를 통해 그 자신을 넘어서느냐는 그다지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독실한 신앙인(신비주의자)의 경험에 비추어 보면, 신이 점지한 사람은 탈도덕적 무의미의 정점에 위치하게 된다. 신앙인의 사랑은, 만약 자신이 직접 내면화했다면 스스로 무너져 무릎부터 꿇었을 과잉을 - 그가 동일시하는 대상인 - 신을 통해 현실화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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