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브 온톨로지: 사랑에 관한 차가운 탐구, 조중걸, 세종서적, 2015(초판 2쇄)
사랑에 대해 말할 때 우리는 먼저 사랑을 정의해야 한다. 그러나 이것은 불가능하다. 비실증적인 것은 정의되지 않기 때문이다. 정의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모두가 자기 편견만을 말할 뿐이다.
젊은 친구들이 어떤 것들에 대해 묻는다. 솔직히 말하자면 모든 물음에는 겁부터 난다. 그들이 어디에선가 답을 구할 수 있었다면 내게 묻지 않았을 것이다.
대학은 교양과 담쌓았다. 거기에서는 교양과 '관련된' 많은 일들을 한다. 그러나 '교양 자체'는 하지 않는다. 할 능력도 없다.
우리가 "개"라고 말할 때 그것은 사실 a1, a2, a3 등등의 개별적인 개들에 대한 경험적 유사성을 일컬을 뿐이다. 우리 언어는 우리를 기만한다. "그것은 개다"라고 말할 때 마치 개의 일반자가 있는 것처럼 우리를 오도한다. 이것이 프레게가 말하는 '우리 언어의 괴상함(an awkwardness of our language)'이다.
'사랑'은 이것 이상이다. '개'라는 개념의 경우에는 최소한 개별적 개들의 실증성이나마 가지고 있지만 '사랑'의 경우에는 전적으로 추상적이기 때문이다. 사랑이 무엇인가에 대해 결국 우리는 말할 수 없다.
사회적 승자는 그 승리가 단지 물질적인 것이라고 인정되는 것을 불편해한다. 그들은 사회적 승리에 정신적 승리를 더하기 원한다. 그들은 문화단체에 기부를 하고 갤러리 등에 대한 욕망이 있으며 학위에 대한 허영을 지닌다. 이런 사람들의 섹스는 물질적 승리 위에 기초하지 않는다. 적어도 자기 자신은 그렇게 생각한다. 그들의 섹스는 자신의 저성적 매력에 기초한다고 믿고 싶어한다.
어떤 여성들은 또한 거기에 맞춰준다. 그들도 때때로 스스로를 기만한다. 인간으로서의 그 남자에게 매혹되었다고. 그러나 자기 마음 깊은 곳에는 마치 기증자의 이름이 건물의 한쪽 구석에 조그맣게 있듯이 - 기증의 목적은 사실은 그것인바 - 부에 대한 희구가 있다. 물론 돈을 받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스스로는 돈 때문에 그 사람과 잔 것은 아니므로. 정말 그럴까?
섹스에 대한 관용과 개방성은 이러한 이념에서 비롯된다. 그날 밤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두 알면서도 (인간의 육욕을 부정하는) 교회에서 그날 낮에 결혼식을 올린다. 이 무슨 비논리인가! 교회가 육욕을 부정적으로 보면서 그것을 축복하는 것은 무엇에 의해 정당화되는가?
사랑이 주제로 대두되면 좌중이 시끄러워진다. 모든 사람들이 자신들의 무의미하고 조잡한 열정과 거기에 따르는 고통이 당연히 본인의 사랑이라고 생각한다.
... 이것들이 사랑일까? 이것들이 예수가 "너의 이웃을 사랑하라"고 말할 때의 그 사랑일까? 그들은 많은 종류의 것들을 사랑이라고 말할 것이다. 연인 간의, 혈연 간의, 친구 간의, 모자지간의.
내가 부정하는 것은 그들의 심적 격동이 아니라 "이것이 사랑이다"라고 말하는 그들의 주장이다.
신이나 사랑이 안 보이는 것은 바람이나 전기가 안 보이는 것과 전적으로 다르다. 그 두 종류는 성격을 달리한다. 신이나 사랑은 물리적 현상이 아니다. 그것들은 단지 침묵 속에서 지나쳐야 할 것들이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침묵의 대상이 부존재한다고 말해질 수는 없다는 사실이다. 침묵 속에서 지나쳐야 할 대상들은 단지 우리가 해명할 수 없다는 사실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우리 마음속에는 무엇인가 외로움, 덧없음, 삶의 무의의 등에 대한 불안과 고통이 자리잡고 있다. 이것들은 무엇인가? 이것들에 대한 어떤 해결책이 있는가? 혹은 이것들을 경감시키기 위한 어떤 수단이 있는가?
사랑은 존재할 수도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것은 우리에게는 미지의 영역이다. 태곳적부터 미지의 영역이었다. 그러나 우리 내면에는 그것에 대한 요구가 있다. 사랑은 우리에게 요청(demand)되고 있다.
지성은 세계에 해명을 요구하지만 세계는 답변하지 않는다. 그것은 세계가 매정해서가 아니다. 지성이 묻지 말아야 할 것을 물었기 때문이다. 답변이 있을 수 없는 곳에 질문을 해봐야 소용없다.
사랑은 없을 수 있다. 그러나 사랑을 구하는 나는 있다. 죽음은 없고 죽어가는 나만 있고 삶은 없고 살아가는 나만 있듯이. 따라서 사랑은 희구와 열망이지 손에 쥐어지는 어떤 것은 아니다.
우리는 사랑이 무엇인지 모른다. 단지 있을지도 모르는 그것에 대한 나의 충동만이 있을 뿐이다. 그것은 대상을 향하지도 목적을 지니지도 않는다. 우리는 단지 사랑하기 때문에 사랑할 뿐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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