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어려서부터 생각해오던 것이 불현듯 떠오른다.
'조건 없는 애정'이 과연 존재하느냐 하는 것이다.
어려서 학교에서 배우기를 부모의 사랑은 조건 없는 사랑이라고 하였는데
실제로 부모님에게는 조건없는 사랑이었을지 모르지만,
자식으로서 느끼기에는 조건 있는 사랑으로 느껴졌던 것이다.
그러니까 물건 하나를 사주더라도 앞으로 공부 열심히 해, 동생과 사이 좋게 지내야 해 등의
말을 꼭 덧붙여 끌어안아야 했다.
학교에서는 늘, 부모님들이 열심히 땀 흘려 벌어오신 돈으로 공부하는 것이니까-
라는 조항을 우리의 의식 속에 심으려 안달이었고.
이제 더이상 연인 사이나 부부 사이에는 '조건 없는 사랑'이라는 말을 쓰지 않는다.
시대가 변했거나, 의식이 변했거나, 사는 게 좀 더 노골적이되었거나.
아무튼 그로 인해 '조건 없는 부모의 사랑'은 남녀 혹은 남남 혹은 여여의 연인 간의 사랑보다
한 수 위의 사랑으로 취급받기도 한다.
나는 조건 없는 애정이 조건 있는 애정보다 더 훌륭한 애정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상호간에 만족스럽게 합의한 '조건 있는 사랑'이 때로는
이상하게 불공정하게 한쪽으로 쏠리기 마련인 '부모자식간의 사랑'보다 나을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더군다나 부모와 자식 사이의 애정의 거래는 언제나, 불공정함을 숙명적으로 내포하며
쿨-하거나 개운한 맛이 없다.
그 이유는 인간 대 인간, 성인 대 성인, 의식 대 의식의 거래가 아니기 때문이다.
대체로 부모는 (통상적으로 얘기되는)'무조건적인 사랑'을 자기들끼리 선택하고 아이를 낳기로 결정한다.
의사가 존재하지 않는 대상을 상대로, 계약을 실행하며, 여기에 있어 아직 태어나지 않은 생명은 어떠한 의결권도 가질 수 없다.
요즘은 그런 말을 하는 것 자체로 웃음거리가 될 테지만, 과거엔 연인 사이에도 '무조건적인 사랑'을
이상적으로 그리곤 했다. 그러나 이 자체가 어불성설인 것이, 상대방에게 무조건적인 사랑을 요구하는 순간 -
이 요구 자체가 바로 조건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무조건적인 사랑이 성립하기 위해선, 상대방에게 그 어떠한 요구도 없이, 그저 나 혼자 조건 없는
사랑을 해야 하는데 너무 무조건적인 사랑을 해도 상대방은 부담스럽거나 불편해진다.
연인들이 싸움을 할 경우, 그동안 묵혀왔던 불만들을 줄줄이 쏟아내는데
이때 터져나오는 오랫동안 묵혀왔던 불만들이 바로 나만의 셈법의 결과물이다.
대충 겉으로 볼 때 평등한 관계의 연인이란, 각자의 계산으로 볼 때는 서로 자기가 마이너스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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