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꽃다발을 좋아하지 않는다.
받는 것도, 주는 것도 싫고, 남들이 그러는 것도 싫다.
아주 오래 전에 내 여자친구의 친구가 꽃다발을 사서 여자친구에게 선물한 적이 있다.
그들은 카페에 가서 "고마워, 꽃아발 정말 이쁘다."
"응, 오늘 후레지아가 참 이쁜 게 있더라고." 이런 식의 대화를 나누었다.
그때 나는 내 여자친구와 그녀의 가장 친한 친구가
꽃다발의 시체를 사이에 두고서 아름답다고 떠들어대는 것이 그로테스크하게 보였다.
그것이 우정의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방식이었기 때문에 더 그렇게 느껴졌다.
꽃다발의 존재란 꽃의 가지를 가위로 절단하는 짓을 수반한다. 그러니까 꽃다발은 아플 것이다.
(꽃은 인간의 방식으로 통증을 느끼진 않는다. 그러나 과학적 연구에 의하면 소리를 듣고 사람을 감지하고,
심지어 공포를 느끼며, 많은 것들에 대해 반응한다. 그러므로 그들만의 방식으로 고통을 느낄 것이다.)
그리고 허리가 잘린 그 순간부터 서서히 말라가면서 서서히 죽어갈 것이다.
그러니까 사람들은 서서히 죽어가는 꽃의 서서히 죽어가는 고통을 바라보며 즐기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집에 들어온 꽃다발은 꽃병에 담겨 시름시름 몇 일 더 살거나, 벽에 걸려 미라가 된다.
나는 꽃다발이 화분보다 비싼 이유가 그 꽃을 죽였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희소성의 원칙으로, 이 꽃다발은 보다 짧은 시간 동안만 생존할 수 있기 때문에 화분보다 비싼 것이다.
혹은 '대량살상'의 몫이거나.(꽃 한 다발에 대체 몇 종의 생명이 묶이는 건지.)
어쩌면 인간의 미적 수준이 매우 높고 성숙해서, '죽음의 미학'의 가치를 인정하기에 비싼 걸지도 모른다.
허리가 잘려 수액이 주륵, 피처럼 쏟아지고, 그 뒤에 서서히 말라붙는 환부를 비닐로 감춘 뒤에,
죽어가는 꽃의 표정과 얼굴을 말똥말똥 쳐다보며 냄새까지 즐기는 이
최고 수준의 죽음의 미학에는 물론 비싼 값을 쳐주어야 하겠지.
내가 화가였다면 허리를 싹둑 자른 남녀의 벌거벗은 시체를 비닐과 끈을 이용해서 한 다발로 묶고
그들의 표정과 향기를 묘사하여 소더비 경매에 비싼 값에 팔려 하였을 것이다.
우리가 꽃다발을 좋아하는 건, 언제나 그렇듯이 학습의 결과다.
우린 들판을 좋아할 수도, 산을 좋아할 수도, 화분을 좋아할 수도, 화원을 좋아할 수도 있지만
대개의 경우 꽃다발을 주고 받으며 축하하고 기뻐하는 경험을 통해,
그리고 꽃다발이 포함하는 자본주의적 지출 - 즉 사치성의 기쁨 - 을 학습함으로서
자연스레 꽃다발 문화를 사랑하게 된다.
그보다, 동네마다 조그만 화원이 만들어지고
입장료를 내고 언제라도 감상할 수 있게 될 수는 없을까.
동네에 꽃과 화분을 아주 아름답게 기르는 사람들이 몇 분은 꼭 있기 마련인데,
이분들의 작은 마당 혹은 정원을 일주일에 몇 번 개방하고 그것을 감상할 수 있는 시스템을 생각해 낼 순 없을까.
'불나면들고나갈것들'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 방침을 사랑한다는 것 (0) | 2017.11.24 |
---|---|
19. 토론의 쓸모없음에 대해 (0) | 2017.11.24 |
17. 조건 없는 애정에 대해 (0) | 2017.11.24 |
16. 차별하지 않는 것의 어려움 (0) | 2017.11.23 |
15. 글쓰기가 어려운 이유 (0) | 2017.11.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