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누군지도 모른 채 마흔이 되었다, 제임스 홀리스, 더퀘스트, 2018(초판 3쇄)




 많은 이들이 인생을 마치 소설처럼 대한다. 마지막 장에서 작가가 전부 설명해줄 거라 짐작하며 책장을 수동적으로 넘긴다. 



 내면의 자신감과 후천적으로 획득한 성격 사이의 불균형이 너무 커진 탓에 더는 그 고통을 억누르거나 보상으로 달랠 수 없게 된 것이다. 이런 현상을 심리학에서는 ‘보상 상실decompensation’이라고 한다. 

예전에 사용하던 태도와 전략을 계속 써보지만 더 이상 통하지 않는 것이다. 마흔의 스트레스 증상은 후천적 성격 아래에 숨어 있던 ‘자기’를 표현하는 것이며, 다시 태어나는 데 반드시 필요한 것이기 때문에 사실 환영할 일이다.



 중간항로는 후천적으로 만들어낸 성격과 ‘자기’의 욕구 사이에 무시무시한 충돌이 벌어지면서 시작된다. 이를 경험하는 사람은 종종 겁에 질려 “이제 내가 누군지초차 모르겠어.”라고 말할지 모른다. 과거의 나를 미래의 나로

교체해야 하며, 과거의 나는 숨통이 끊어져야 한다. 그러니 엄청나게 불안해지는 것도 당연하다.



 인간은 낡은 자신을 소환해서 죽여야만 비로소 새롭게 태어날 수 있다. 



 사춘기에 겪었던 산산조각난 상처쯤은 아무것도 아닐 정도로 30대 중반이 넘은 이들은 이미 실망과 가슴 아픔을 충분히 겪었다. 중년에 접어든 사람이라면 미래에 대한 전망과 희망, 기대가 무너지는 일을 겪어보았을 것이다.

자신의 재능, 지성, 용기의 한계 역시 경험해보았을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경험하는 중간항로의 특징은 고루한 표현이긴 하지만 ‘현실적 사고realistic thinking’다.



 “나는 다른 사람에게서 꽉 찬 부분을 보는 공백과 같아.”



  우리가 감정을 선택한 게 아니라, 감정이 스스로의 논리로 우리를 선택한 것이다.



 우리 모두는 신경증적이다. 현실의 자신과 스스로 원하는 자신 사이의 괴리를 경험하기 때문이다. 



 공포는 도전이자 과제다. 대담해져야 공포로부터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니체는 결혼이란 “거대한 대화”라고 말했다. 



 결혼의 혼돈 모델이 주장하듯 인간은 다른 반쪽을 찾는 절반이 아니라 여러 가지 면을 지닌 다면체로 생각하는 게 맞지 않나 싶다. 아무리 완벽한 상대와 함께한다 해도 이 세계에서는 다면체 두 개의 모든 면을 한 번에

볼 수 없다. 기껏해야 몇 개만을 볼 수 있다. 



 융은 신경증을 “자신과의 불일치”라고 간단하게 정의했는데, 이는 개성이 한쪽으로 치우친다는 뜻이다. 이 정의는 우리 모두에게 해당한다.



 구체적으로는 우리가 자주 회피하는 일, 그래서 배우자 등 타인에게 자주 부탁하는 일을 스스로 할 수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우리 대부분은 어떤 행동을 하고 나서 당황했던 적이 있다. 바람을 피우거나 약물을 복용하거나 자신을 믿고 의지한 사람들을 배신하는 일 말이다. 새벽에 눈을 떴을 때 악마가 침대 건너편에서 웃으며 자신을 보고 있는

경험을 해보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로마시대 시인 테렌티우스Terentius는 “인간에 대한 어떤 것도 남의 일로 보지 않는다”라고 말했는데, 인류역사상 가장 현명한 발언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한 인물을 구성하는 각 부분이 동시에 성숙한다고 믿을 이유는 없다. 



 카프카는 일찍이 위대한 소설작품은 우리 안에 얼어붙어 있는 바다를 깨부스는 ‘도끼’와 같아야 한다고 썼다. 



 엄마는 말한다, 아무도 살지 않는 노스다코타주

     지역을 모두 모아놓은 것마냥

표정 없는 얼굴로,



 프랑스의 시인 아폴리네르Guillaume Apolinaire는 “추억은 바람에 날려 사그라드는 사냥꾼의 나팔소리”라고 묘샤했다. 삶의 약력은 덫과 같다. 우리를 속여 결국 겉으로는 사실처럼 보이는 과거와 상처로 정의된 운명에

묶이도록 유혹한다. 



 구원도 없고, 상황을 타개해줄 부모도 없으며, 예전으로 돌아갈 방법도 없음을 먼저 인정해야 하기에 성가신 일임엔 틀림없다. ‘자기’는 이미 지쳐버린 자아의 전략을 완전 소진하여 성장을 꾀한다. 개인이 힘들게 일군 자아의

구조는 이제 의미도 없고 겁에 질려 아무 해결책도 내놓지 못하는 애물단지로 전락해버렸다. 중년에 들어선 자기는 경로를 수정하기 위해 자아의 조합을 일부러 위기로 몰아넣는다. 



 ‘해답은 모두 우리 안에서 나온다.’



 온전한 삶에 필요한 자원은 우리 안에 있으며 다른 사람에게 좌우되는 것이 아님을 깨달으면 끝내 우리 자신은 자유로워진다. 



 그렇다면 문제는 신화가 없는 삶이 아니라, ‘어떤 신화를 갖고 살 것인가’다. 우리는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언제나 이미지의 인도를 받기 때문이다. 



 우리는 외부의 이데올로기와 개인의 신경증 중에서 양자택이하도록 강요받으며, 이를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은 개성화의 길을 따르는 것뿐이라고 말했다. 



 ‘나는 내게 일어난 일의 총합이 아니다. 이렇게 되겠다고 스스로 선택한 결과다.’



 “너 자신을 알라.” 한 고대 문헌에 따르면 내실로 들어가는 입구에는 여기에서 파생한 다른 문구가 붙어 있었다고 한다. “네가 바로 그것이다.”



 17세기 철학자 블레즈 파스칼Blaise Pascal은 저서 <명상록Pensees>에서 농담은 왕을 외롭지 않게 할 목적으로 발명됐다고 서술했다. 아무리 왕일지라도 스스로에 관해 생각하면 자연히 짜증스럽고 불안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파스칼은 현대의 모든 문화란 우리가 외로움에 빠지거나 자신에 관해 생각하지 않기 위한 광대한 오락divertissement이라고 주장했다. 



 열정 없는 삶에는 깊이가 없다.... 깊이의 원형인 신의 요구로 열정이 우리에게 짐지우는 삶의 거대함을 무릅쓰지 않고서는 신에게 가까이 갈 수 없다. 스스로의 열정을 발견하고 따르면 개성화를 완성할 수 있다. 



 시인 딜런 토머스가 적확하게 표현한 대로 “푸르른 도화선으로 꽃을 몰고 가는 그 힘이 나를 파괴한다.” 마흔에 이르러 우리는 푸르른 청춘의 에로스가 마치 스스로를 태우는 도화선처럼 영원히 지속될 수 없음을 깨닫고는

충격을 받는다. 따라서 나이 먹은 남성이 ‘젊고 달콤한 연인’과 사랑의 도피를 하는 것, 그리고 여성이 시간의 흔적을 숨기려 콜라겐 치료나 성형수술을 받고 스파에서 끙끙대며 땀을 흘리는 것이 그리 놀라운 일은 아니다.



 과거의 자신에 연연하지 않고, 명성이나 부, 또는 젊었을 때의 외모를 더 찾지 않게 될 때 중간항로를 무사히 마칠 수 있다. 



 융은 삶이 “실은 하나인 두 개의 수수께끼 사이에서 빛나는 잠깐의 정지 상태”라고 말했다. 



인생의 구루guru 같은 건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사람은 그 길이 다르기 때문이다. 



 우리가 느끼는 고통은 “삶의 질문에 대해 부적절하거나 잘못된 해답을 내놓고 만족하려” 했던 사람의 영혼이 겪는 고통이라고 융은 우리에게 상기시킨다.



 나는 신의 주위를 돈다, 고대의 탑 주위를,

 이미 천 년 동안을 그렇게 돌아왔다.

 그리고 나는 아직도 내가 매인지, 폭풍이지,

 아니면 위대한 노래인지 알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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