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과 개와 인간의 마음, 대니얼 웨그너/커트 그레이, 청림출판, 2017(1판1쇄)





 다른 사람의 구체적인 경험들이 어떤지에 대한 알 수 없는 불확실성보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당신이 다른 사람의 마음이 ‘존재’한다고 확실할 수 있는 방법이 전혀 없다는 점이다. 그렇기에 어쩌면 당신은 이 세계 전체에서 유일한 마음을 가진 존재일지 모른다. 


 ‘신’은 많은 사람들이 믿지만 본 적은 거의 없는 마음이다..


 종교적 믿음은 어떤 면에서는 수백만 년의 진화를 통해 다듬어져 우리의 자연적 성향이 된 마음 지각의 확장으로 볼 수 있다. 


 방금 자른 풀의 냄새를 상상해보라. 당신에게는 이 냄새가 한가한 여름날을 상기시킬지 모르지만, 실제로 이 냄새는 잘려나간 풀잎에서 급박하게 방출된 페로몬 때문이며 이것은 주위 풀들에게 공포의 잔디 깎는 기계가 다가오고 있다는 위험을 알리는 기능을 한다. 


 샘플 시식 후 사람들은 마음 설문조사에 응답했는데, 거기에는 소의 정신 능력을 평가하는 문제가 포함되어 있었다. 조사 결과 캐슈너트를 먹은 사람들은 소에게 상당한 정신 능력이 있을 것이라고 평가한 반면에, 육포를 먹은 사람들은 소에게 생각도 감정도 없을 것이라고 평가했다. 또한 후속 연구에서는 동물을 ‘식품’으로 명명하기만 해도 그 동물의 고통 능력이 현격히 낮은 것으로 지각된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중세에는 동물을 재판한 사례가 많았다. 그중에는 농작물 파괴로 유죄를 선고받은 메뚜기, 알을 낳는 암탉 행세를 해서 사형 선고를 받은 수탉 등이 있었다. 


 쌍의 완성은 역사적인 동물 재판을 설명해줄 뿐만 아니라 개가 아이를 물었을 경우 개 주인이 지게 되는 책임도 설명해준다. 동물이 아이와 함께 있으면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른다는 사실을 단순히 인정하는 것으로는 심리적으로 충족되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주변에서 가장 행위 능력이 높다고 판단되는 행위자를 찾게 되고 소송을 제기한다. 


 예컨대 당신의 노트북이 답답하게 꾸물거리는 순간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p-n 접합 용량에 과부하가 걸렸군 같은 생각이 아니라, 프로그램을 너무 많이 열어서 얘가 열을 받은 모양이네 같은 식으로 생각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세상이 꽁꽁 얼어붙은 겨울 아침에 자동차 시동이 잘 안 걸리면 우리는 보통 카뮤레이터와 온도의 복잡한 상호작용에 관해 생각하기보다는 날이 추워서 내 차도 꼼짝하기가 싫은가 보네라는 식으로 생각하면서 직장에 늦지 않게 제발 좀 가자고 차에게 빌기까지 한다. 

 이러한 예에서 볼 수 있듯이 기계에서 마음을 읽어내는 경향은 주로 기계가 우리의 바람대로 작동하지 않을 때 뚜렷이 나타난다. 기계가 잘 작동할 때는 기계가 우리의 통제하에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러나 기계가 말을 듣지 않으면 왜 그런가를 이해하기 위해 기계의 마음을 끌어들이곤 한다. 


 사람들은 새로 장만해 온갖 첨단 기술이 도입된 아우디 자동차보다 자신의 구닥다리 시보레 트럭을 더 마인드 클럽의 회원처럼 여기는 경향이 있다. 아우디는 자신의 할 일을 정확히 수행하기 때문에 오히려 마음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 반면에, 자신의 오래된 ‘애마’인 시보레는 격려와 위로를 필요로 하며 때로는 애로 사항을 자상하게 들어줘야만 하기 때문이다. 


 심리학자 캐리 모어웨지는 이런 형상을 가리켜 마음 지각의 ‘부정성 편향’이라고 불렀다. 이것은 부정적 사건이 긍정적 사건보다 더 마음 지각을 유발한다는 뜻이다. 


 당신은 로봇학대방지협회SPCR에 돈을 기부한 적이 있는가? 1999년에 설립된 이 단체의 임무는 만들어진 지능을 둘러싼 일부 윤리적∙도덕적 문제에 관한 공중의 의식을 제고하는 것이다. 로봇의 도덕적 권리라고? 그들은 진심인가? 그들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로봇학대방지협회는 로봇에게 지각력이 있다는 주장만큼 진지하게 이 주장을 제기하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폭발물을 찾아내 폭발시키도록 설계된 로봇인 마크봇MARCbot이 파괴되었을 때, 군인들은 이 로봇을 위해 정식 장례식을 치렀으며 마지막에는 21발의 예포까지 쏘았다. 2장에서 살펴본 군용 개와 마찬가지로 사람들은 영웅적 업적을 세운 기계에게 마음을 부여한 것으로 나타났다. 


 어쩌면 당신은 최근 바닷가에서 휴가를 즐길 때 그녀가 내뱉은 말이 떠오를지 모른다. 바닷가는 딱 질색이야. 그 많은 모래하며 날파리하며 싸구려 기념품 가게하며……” 그녀는 ‘당신’이 멋진 시간을 보내고 있다는 사실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 그녀는 자신의 시뮬레이션과 당신의 경험을 분리할 능력이 없다. 이런 ‘자기중심성egocentrism’은 사람들 중에서도 가장 이기적인 집단인 아이들을 대상으로 이미 오래전부터 증명되어 왔다. 


 한 연구에 따르면 의사들은 환자를 만난 지 평균 12초 만에 환자의 말을 끊었으며, 환자의 말에 전혀 귀 기울이려 하지 않았다. 즉 의사들은 대개 환자의 경험을 이해하려는 마음이 없었다. 

D. R. Rhodes et al., “Speaking and Interruptions During Primary Care Office Visits,” Family Medicine 33 (2001): 528-32

https://www.ncbi.nlm.nih.gov/pubmed/11456245


 그러므로 다음번에 사람들이 당신의 헌신적 태도를 칭찬하거든 경계심을 늦추지 말아야 할 것이다. 남을 위해 희생하면 남이 당신을 희생시키기가 그만큼 쉬워지기 때문이다. 


 정신병자는 위기 앞에서는 대단히 침착하다. 이것은 어떤 정신병이 고압적인 환경에서 성공하는 데 도움을 주는 이유를 설명해줄지도 모른다. 최고 경영자는 정신병자라고 불릴 가능성이 보통 사람보다 4배 더 많다는 사실은 그리 놀랄 일이 아니다. 


 강간을 예로 들어보자. 사람들은 종종 피해자를 비난의 눈초리로 바라보며 여자가 술을 마셨는가, 무슨 옷을 입고 있었는가 하고 물으면서 범죄를 합리화한다. 사람들은 대개 세상을 공정하고 정의로운 것으로 보려는 욕구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피해가 본질적으로 부당한 것일 때도 불구하고 피해를 당한 만하니까 당했다는 식으로 생각한다. 사람들은 자신에게는 끔찍한 일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세상의 미친 짓에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런 왜곡된 사고방식에 따르면 ‘공정한 세상’이란 피해자가 고통을 당할 만하니까 당하는 세상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피해자의 책임이 무엇인지를 찾게 된다. 


 수동자에 관한 4장에서 살펴본 것처럼 우리는 공감을 느낄 때 다른 사람을 도와준다. 얼굴도 모르는 아프리카 어린이 수천 명에 대한 이야기보다 단 한 명의 어린 미국인 여자아이에 대한 이야기에 공감하기가 더 쉽다. 


 심리학적으로 말하자면 우리는 착한 행동은 그저 우연적인 것으로, 나쁜 행동은 의도적인 것으로 지각한다. 


 트롤과 싸우는 두 번째 방법은 불에는 불로 싸우듯 트롤에게는 맞받아치는 것이다. 이것은 해커 집단 어나니머스Anonymous가 즐겨 사용하는 방법 가운데 하나다. 어나니머스는 집단의 대단한 컴퓨터 실력을 이용하여 나름대로 사회 정의를 증진한다. 


 사람들은 집단 속에 있으면 마음이 더 적어지는 것과 마찬가지로 노력을 덜 기울인다. 20세기 초 프랑스의 연구자 막시밀리앙 링겔만Moximilien Ringelmann은 로프를 혼자서 당길 때와 팀의 일원으로 당길 때의 개인의 노력을 평가했다. 링겔만은 로프를 혼자서 당길 때보다 팀의 일원으로 당길 때 힘을 훨씬 적게 쓴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이를 ‘링겔만 효과’라고 하는데, 흔히들 ‘태만’이라고 한다. 링겔만 효과를 보여주는 또 다른 예를 들어보자. 오하이오 주립대학교의 연구자들은 사람들에게 소리를 지르거나 박수를 치게 할 경우 집단 속에 있을 때보다 혼자일 때(완전히 미친 짓처럼 보이기는 하지만) 훨씬 크게 소리를 지르고 박수를 친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마음 없는 세포들의 상호작용을 바탕으로 어떻게 마음이 생겨나느냐의 문제는 현대 과학이 직면한 가장 어려운 문제 가운데 하나다. 그러나 과학자들 대부분은 그 답이 ‘창발創發, emergence’이라는 데 동의한다. 창발이란 낮은 단계의 요소들이 결합하여 더 높은 단계에서 단순한 요소들의 합 이상이 되는 것을 말한다. 


 사실 힙스터는 힙스터라고 불릴 때 가장 분개한다. 


 모순을 말하자면, 친구나 가족이 죽는 것을 상상하는 것은 어려울 뿐이지만 당신 자신이 죽는 것을 상상하기란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말 없는 자에 관한 6장에서 정서 예측과 관련해 논의한 것처럼 우리는 미래의 자기 마음을 잘 지각하지 못한다. 그렇다면 마음이 완전히 사라진 때의 자기 마음은 어떻게 지각하는가?


 독일의 사회학자 어니스트 베커Ernest Becker는 바로 이 문제에 매달렸다. 베터는 우리 자신의 죽음에 대한 지식은 우리 종을 규정짓는 특징이라고 말했다. 분명히 동물은 임박한 종말에 대해 모르는 것 같다. 


 베커는 지그문트 프로이트를 본따 인간의 마음은 죽음에 대한 생각을 적극 억압한다고 주장한다. 

 베커는 죽음에 대한 생각이 끔찍해서 사람을 마비시킨다고 믿었다. ‘공포 관리 이론Terror Management Theory’을 발전시킨 몇몇 심리학자의 연구 프로젝트는 바로 이런 공포에 대처하는 방법을 연구한 것이다. 그들은 죽음의 공포에 대처하는 방법은 두 가지라고 말한다. 하나는 우리(엄밀히 말하면 우리의 마음)는 절대로 죽지 않고, 의식은 사후 세계에서 지속될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죽음의 공포에 대처하는 두 번째 방법은 문화적 성과를 통해 상징적인 불멸을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사람들의 마음이 엄밀히 따지면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그것을 지각할 수밖에 없는 것처럼, 우리는 신이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신을 지각할 수밖에 없다. 


 신은 우리가 어떤 색깔의 양말을 신는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는 반면에, 우리가 탈세를 하는지 또는 이웃의 새 자동차에 대해 질투심을 느끼는지 등에 대해서는 큰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신의 관심이 이렇게 도덕적 문제에 쏠리는 까닭은 행위자를 통한 쌍의 완성을 위해서다. 다시 말해 고통이 있는 곳에는 또한 강력한 도덕적 행위자가 있어야 한다고 우리가 생각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사람들은 책임 소재가 불분명한 ‘도덕적 간극’이 생겼을 때 그곳에서 신을 보았다. 


 실제로 대다수 사람들은 자신이 외모도 평균 이상이고, 운전 기술, 지능, 친절, 운동 능력도 평균이상이라고 답할 것이다. 그러나 통계학적으로 보면 이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세계 인구의 족히 절반은 무슨 능력에서든 평균 이하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그렇다. 당신의 잠자리 능력이 평균 이하일 확률도 50퍼센트인 셈이다.)


 신경과학자 마이클 가자니가Michael Gazzaniga의 주장에 따르면 우리의 의식적 자기는 우리의 행동에 대해 사후적으로 그럴듯한 이야기를 지어내는 ‘해석자’에 불과하다. 


 이제 우리가 관심을 가지는 세 시점이 있다. 즉 의지시점W, 뇌 활성화 시점B, 운동 시점M이 그것이다. 리벳은 수백 회에 걸친 측정을 통해 이 사태들의 순서를 정확히 확인할 수 있었으며, 나아가 이를 통해 자유의지의 개념을 검사할 수 있었다. 쉽게 말해서 당신의 뇌가 먼저 손가락을 움직이기를 시작한 후에야 비로소 당신이 손가락을 움직이기로 마음을 먹는다는 얘기다. 뇌 활성화가 손가락을 움직이려는 당신의 결정보다 선행하므로 당신의 결정은 사실상 결정도 아닌 셈이다. 


 리벳의 논문이 1985년 처음으로 학술지에 발표되었을 때, 그 학술지에서 논평을 의뢰한 26명의 과학자들은 이 연구를 흔들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과학자들이 제기한 어느 비판도 유지되지 못했으며, 그로부터 30여 년이 지난 오늘날 우리에게 남은 것은 다음과 같은 냉정한 발견뿐이다. 자유의지란 우리의 무의식적 뇌가 운동을 먼저 결정한 ‘다음에야’ 비로소 우리가 얻게 되는 느낌이다.


 연구자들은 실험 참가자의 운동피질을 활성화하는 동시에 실험 참가자에게 왼손 또는 오른손을 움직이라고 말했다. 이때 어느 손을 움직일지는 전적으로 참가자의 선택에 맡겨져 있었는데도, 그들은 경두개 자기자극의 성질과 일치하는 손을 ‘자유롭게 선택’했다. 즉 자석을 통해 시계 방향으로 전기 펄스를 보내면 실험 참가자는 오른손을 움직이는 선택을 했고, 시계 반대 방향으로 전기 펄스를 보내면 왼손을 움직이는 선택을 했다. 실험 참가자들은 사실상 자석을 조종하는 연구자의 꼭두각시에 불과했지만, 놀랍게도 여전히 어느 손을 움직일지를 자신이 완전히 자유롭게 선택한다고 느꼈다. 


 자기를 인격체라기보다 로봇처럼 대함으로써 실행 의도는 악마의 유혹과 씨름할 필요도 없이 당신의 목표 달성을 가능케 한다. 그러나 모든 악마를 이렇게 쉽게 추방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특히 실행 의도도 별 쓸모가 없는 자기 통제의 영역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사고의 통제다. 


 파핏에 따르면 어제의 당신과 오늘의 당신이 동일한 사람이라는 것을 당신이 아는 까닭은 당신의 이런저런 기억들이 그대로 남아서 질서정연하게 서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심리학이 보여주듯이 기억은 상실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변경될 수도 있으며, 그래서 자기에게 근본적인 변화가 생길 수도 있다. 마음의 석판에 지워지지 않게 새겨진 어떤 것으로 기억을 묘사하는 통속적인 설명과 달리 기억은 오히려 연극 공연에 더 가깝다. 이것은 시간이 흐르면서 덩달아 변화하는 대강의 각본을 토대로 이루어지는 조야한 재상연과도 같다. 


 우리가 타인의 말과 행동을 기초로 그 사람의 마음을 지각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기억을 기초로 우리 자신의 마음을 지각한다. 그러므로 우리 자신도 타인과 마찬가지로 특별할 것이 없다. 우리 각자는 기억의 집합일 뿐이다. 그리고 기억의 어느 한 집합(즉 당신 자신의 기억)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당신이 다른 기억을 가진 다른 누구보다 더 낫거나 더 나쁜 것은 아니다. 그렇다. 만약 당신이 다른 누구의 기억을 가지고 있다면 그리고 그가 당신의 기억을 가지고 있다면, 당신은 그일 것이고 그는 당신일 것이다. 


 자기는 그리 비싸지 않은 가구의 주요 소재로 쓰이는 파티클보드와 같다. 겉보기에 파티클보드는 딱딱하고 의심의 여지없이 실재한다. 그리고 비유적으로 말하자면 이것은 자기와 마찬가지로 다른 사람의 무게를 견딜 수 있고, 너무 세게 치면 부러지며, 다른 사람에게 해를 입힐 수 있는 날카로운 구석도 있다. 또한 다른 파티클보드 조각과는 근본적으로 분리되어 있다. 그러나 조금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 재료는 압축하고 접착제로 붙인 작은 섬유들의 집합일 뿐이다. 서로 분리된 파티클보드 조각 몇 개를 물웅덩이에 넣으면 접착제가 천천히 녹아 결국에는 모든 섬유가 분리되고 함께 떠다니면서 완전히 뒤죽박죽이 될 것이다. 


 우리는 영원히 하나의 관점이다. 


 우리가 세계를 직접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지각한다’는 사실을 깨달으면, 자기가 망가지기 쉽다는 사실과 자유의지가 착각이라는 사실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마음이 보이는 것 이상이기도 하고 이하이기도 하다는 사실도 깨달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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