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에서 우주를 보다, 데이비드 조지 해스컬, 에이도스, 2017(초판 6쇄)




 지의류가 추운 겨울을 이겨낸 비결은 버림의 역설이다. 지의류는 온기를 얻기 우해 연료를 태우지 않으며 주위 온도에 따라 생명 활동을 조절한다.



 작물은 인간과 더불어 산 기간이 1만 년밖에 안 되지만, 그 사이에 자신의 독립성을 포기했다..... 옥수숫대와 농부가 한 몸이 된 격이다.



 우리는 러시아 인형(마트료시카)이다. 우리가 살아 있는 것은 우리 안의 다른 생명들 덕분이다. 



 우리 눈에는 세 가지 종류의 색 수용체가 있어서 원색 세 개와 주요 혼색 네 개를 감지하는 데 반해 미국박새는 자외선을 감지하는 색 수용체가 하나 더 있다. 그 덕에 원색 네 개와 주요 혼색 열한 개를 볼 수 있어서,

인간이 경험하거나 심지어 상상할 수조차 없을 만큼 넓은 색시각 범위를 자랑한다. 



 초봄의 이 화창한 아침에 노루귀가 따스한 첫 햇볕과 하늘 나는 벌들을 당당하게 맞이하는 광경을 보면서, 만다라가 인간의 이론과 무관하게 존재한다는 사실을 새삼 실감한다. 나는 여느 사람처럼 문화에 얽매여 

있기에 꽃을 총체적으로 보지 못한다. 내 시야의 나머지 부분은 수백 년에 걸친 인간의 언어에 점령당했다. 



 친척인 문어나 꼴뚜기와 달리 이 물달팽이는 정교한 렌즈와 바늘 구멍(동공)이 없어서 선명한 영상을 만들어내지 못한다. 하지만 흐릿한 세상이 달팽이에게 어떻게 보이는가는 미스터리다. 과학자들은 달팽이가 

무엇을 지각하는지 연구하느라 애를 먹는다. 




 내가 알기로, 물달팽이가 색깔이나 운동을 감지하는지, 불 붙은 링을 볼 수 있는지 알아낸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런 실험이 흥미롭긴 하지만, 그 전에 더 폭넓은 질문을 던졌어야 했다. 달팽이가 본다는 것이 과연

무엇인가, 라는 질문 말이다.



 알에서 깬 애벌레는 꽃가루 반죽 속으로 파고들었다가 몇 주 뒤에 나타난다. 벌 애벌레의 몸은 순전히 꽃으로 만들어졌다. 꽃가루와 꿀은 그 뒤로 평생 동안 벌을 먹여 살린다. 벌은 다른 것은 아무것도 먹지 않는다.

벌이야말로 1960년대 히피의 모토 ‘꽃의 힘’의 원조다. 



 나방 한 마리가 내 살갗 위에서 황갈색 다리를 꼼지락거리며 수천 개의 화학적 탐지기로 간을 본다. 여섯 개의 혀! 녀석에게는 걷는 것이 곧 맛보는 것이다. 나방이 손이나 나뭇잎 위를 걷는 것은 입을 벌리고

포도주를 헤엄치는 것 같으리라. 



 인간의 땀은 혈액에서 큰 분자를 모조리 제거하여 만든다. 죽을 체에 거른 것과 비슷하다. 혈관에서 빠져나온 혈액은 세포 사이의 공간을 지나 땀관 바닥에 있는 꼬인 대롱에 스며든다. 이 액체가 땀관 위로 올라올 

때 몸에서는 귀한 무기질인 나트륨을 뽑아내어 세포에 돌려준다. 땀이 빨리 흐를수록 나트륨을 뽑아낼 시간이 적으므로, 땀이 비오듯 할 때는 땀의 무기질 조성이나 혈액의 무기질 조성이나 거의 다르지 않다. 

덩어리만 없다뿐이지 말 그대로 피땀이다. 땀이 천천히 배어 나오면 나트륨은 적어지고 칼륨은 상대적으로 많아진다. 우리 몸은 칼륨을 재흡수하려고 기를 쓰지는 않기 때문이다. 



 이 여명을 만들어낸 광자는 태양 표면에서 출발하여 1억 5000만 킬로미터를 여행했다. 하지만 빛조차도 느려지고 걸러질 수 있다. 이 감속 현상은 압축된 원자들의 핵융합에서 광자가 탄생하는 무대인 태양 내부에서

가장 뚜렷하게 드러난다. 태양의 핵은 밀도가 아주 높기 때문에, 광자가 표면까지 이동하는 데 1000만 년이 걸린다. 표면까지 가는 동안 광자는 끊임없이 양자의 방해를 받는다. 양자는 광자의 에너지를 흡수하여 잠시

잡아주었다가 또 다른 광자의 형태로 내보낸다. 1000만 년 동안 올가미에 잡혀 있던 태양의 광자가 마침내 풀려나면 지구에 도달하는 데는 8분 밖에 안 걸린다.



 용기 안에 곤충과 오래된 <뉴욕 타임스>를 넣어두면 곤충은 성체로 자라지 못한다. 이에 반해 런던의 <더 타임스> 위에서 키운 곤충은 성체에 도달한다. (읽을거리의 수준 때문은 아니다.) <뉴욕 타임스>를

인쇄한 종이에는 발삼전나무balsamfir로 만든 펄프가 들어 있다. 발삼전나무는 초식곤충의 호르몬을 흉내 내는 화학 물질을 분비하여 적의 생장과 번식을 방해함으로써 스스로를 지킨다. 반면에 <더 타임스>는

호르몬 방어 수단이 없는 나무로 만들기 때문에, 실험실 곤충의 깔짚으로 써도 안전하다. 

 이제 물어야 할 것은 식물이 어떻게 초식곤충의 공격에서 살아남는가가 아니라 초식곤충이 어떻게 해서 독초에 대처하는가다.



 피 2밀리그램은 내게는 아무것도 아니지만, 몸무게가 두 배로 늘어난 모기는 날기가 여간 고역이 아닐 것이다. 녀석이 식사를 마치고 제일 먼저 하는 일은 나무 줄기에 앉아 자기가 빨아들인 피의 일부를 오줌으로

배출하는 것이다. 인간의 혈액은 모기의 몸보다 훨씬 염도가 높기에 염분도 오줌으로 배출해야 한다. 안 그러면 생리적 평형이 깨진다. 녀석은 한 시간 안에 내 혈액에 들어 있던 물과 염분의 절반을 쏟아낼 것이다.

남은 혈액 세포는 소화될 것이고, 나의 단백질은 모기 알 노른자로 탈바꿈할 것이다.



 사람이 만든 전구는 대부분의 에너지를 열로 허비하는 데 반해 반딧불이는 발광에 쓰는 에너지의 95퍼센트 이상을 빛으로 전환한다. 



 미생물은 속도만으로 경쟁하는 것이 아니다. 더 직접적인 무기가 있으니, 대다수 동물이 썩은 고기를 먹고 탈이 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한 가지 이유는 미생물이 식량을 지키려고 분비한 독소 때문이다. ‘음식에

독울 터눈 것’은 마당 울타리에 가시를 두르는 것과 같다. 우리의 미각은 미생물의 진화적 의지에 따라 왜곡되었다. 우리는 썩은 음식을 보면 미생물의 방어용 분비물을 피하려고 뒷걸음친다. 하지만 쇠콘도르는

그렇게 쉽게 물러나지 않는다.



 도시에 사는 우리는 노력을 해야만 이 신호를 알아차릴 수 있다. 우리는 습관적으로 ‘배경소음’을 무시하고 마음속 소음에서 단서를 찾는다. 우리는 숲에서 앉아 있거나 걸어다닐 때 대개 과거와 미래를 생각하며

머릿속에서 파도를 탄다. 다들 그런 경험이 있을 것이다. 의지력을 거듭 발휘해야만 현재로, 우리의 감각으로 돌아올 수 있다. 



 숲에서 앉아 있거나 걸을 때, 나는 ‘대상’을 관찰하는 ‘주체’가 아니다. 나는 만다라에 들어가 소통의 거미줄, 관계의 그물망에 걸린다. 알든 모르든 나는 사슴을 놀래고 줄무늬다람쥐를 겁주고 산 잎을 밟아 이 그물망

에 변화를 일으킨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군사 전략가들은 색맹인 병사가 색각(색시각)이 정상인 병사보다 위장을 간파하는 데 뛰어나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이후의 실험에 따르면 이색형 색각자(안구에 색 수용체가 두 가지밖에 없는

사람으로, 이른바 적록 색맹)는 삼색형 색각자(안구에 색 수용체가 세 가지 있는 사람으로, 일반적인 경우)보다 위장을 잘 알아차린다. 삼색형 색각자는 색의 변이에 집착하다 엉뚱한 착각을 하지만 이색형 색각자는

질감의 경계선을 감지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나무가 쓰러진 뒤에야 이것이 얼마나 거대한 생명체인지 알 수 있다. 바닷가에 떠내려와 죽은 고래처럼 말이다. 



 엿보는 것은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이다. 낙엽 아래의 흙 반 움큼에는 10억 마리의 미생물이 살고 있지만 실험실에서 배양하고 연구한 것은 1퍼센트에 불과하다. 나머지 99퍼센트는 상호 의존 관계가 너무 깊고

 이 관계를 모방하거나 복제할 방법이 없기 때문에, 배양하고 연구하려고 분리하면 죽는다. 그래서 흙의 미생물 공동체는 커다란 미스터리로 남아 있으며, 대부분의 미생물은 명명되거나 알려지지 않은 채 살아간다.



 결국, 크고 뭍에 사는 우리는 동물의 다양성을 보지 못할 뿐 아니라 생물 생리의 참된 본성 또한 알지 못한다. 우리는 생명의 살갗 표면에 달린 커다란 장신구에 불과하다. 몸을 구성하는 수많은 미세한 생물들에 

대해서는 어렴풋이 알 뿐이다. 만다라의 표면 아래를 엿보는 것은 살갗을 살짝 눌러 맥박을 느끼는 것과 같다. 



 동물도 일광욕을 즐기지만, 현대 생물학 교육 과정에서는 이런 사실을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



 인간과 야생 갯과 동물, 가축화된 개는 소리의 진화적 그물 속에서 엉켜 살아간다. 숲 밖에서는 구급차의 사이렌 소리가 초랑의 울음소리를 흉내 내어 인간의 깊숙한 두려움을 자극함으로써 이목을 집중시킨다. 

개들은 사이렌 소리가 늑대 울음소리인 줄 알고 구급차를 향해 짖어댄다. 숲은 문명 속까지 따라와 우리 정신에 박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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