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생각만큼 생각을 잘하지 못하는 이유, 앨런 제이콥스, 대성KOREA.com 2018(1판 1쇄)
청교도주의를 따르는 타자를 비난하는 사람은 실제 청교도에 대해 알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다. 적어도 그 순간만큼은 ‘생각하지 않기’로 작정한 것이다.
로빈슨은 이런 환경에서 “승인받지 못한 관점은 사실상 몰이해라는 처벌을 받는다”라는 섬뜩한 지적으로 글을 맺는다. 그 이유는 우리가 의식적이고 의도적인 이단 사냥꾼들의 사회에 살고 있어서가 아니라(어느
정도는 그렇지만) “합의에 집착하는 본능이 지나치게 큰 결과” 때문이다. 생각하고 싶다면 ‘합의에 집착하는 본능’의 크기를 줄여야 한다.
“우리는 어떤 문제를 알지 못할 때 혹은 충분히 알지 못할 때 항상 생각을 감정으로 대체한다”
우리가 생각하는 모든 것은 다른 사람들이 생각하고 말한 것에 대한 반응이다. ‘스스로 생각했다’는 칭찬에 담긴 속뜻은 대개 ‘내가 싫어하는 사람들처럼 말하지 않고 내가 인정하는 사람들처럼 말했다’는 것이다.
그때 알렉산더는 “만약 당신이 파란 팀이라면, 당신의 외집단은 알카에다, 무슬림, 흑인, 유대인, 무신론자가 아니라 그저 빨간 팀이다”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우리에게 진정한 외집단은 옆집에 사는 사람이다.
“우리는 자신과 가까운 집단을 근접 모드로 바라보며, 그 공과에 따라 유용한 우군 또는 위험한 적군으로 판정한다. 반면 멀리 있는 집단은 대개 원거리 모드로 바라보고 이국적인 대상으로 만든다.
이국화 exoticization는 고결한 야만인의 경우처럼 긍정적인 방향으로 이루어지기도 하고(널리 알려진 사례로는 티베트 사람들에 대한 인식이 있다), 만화에 나오는 전형적인 악당처럼 혐오스럽다기보다
우스꽝스럽거나 흥미로운 존재로 그리면서 부정적인 방향으로 이루어지기도 한다. 칭기즈칸이 그런 예다. 객관적으로 그는 당대의 가장 사악한 인물 중 하나로서 수백만 명을 죽였다. 그러나 우리는
원거리 모드에서 그를 바라보기 때문에 흥미뿐 아니라 삐뚤어진 존경심마저 가지게 된다. ‘와, 정말 피에 굶주린 전쟁광이군’이라고 생각하면서 말이다.”
글을 읽고 이해하는 능력인 문해력literacy은 본래 자신이 가지고 있는 특성을 강화시키므로 탁월한 발명품이다. 이미 어느 정도 지혜를 가진 사람이 책을 읽으면 훨씬 많은 지혜를 얻을 수 있다. 반대로 이미
어리석은 성향을 가진 사람이 책을 읽으면 더욱 어리석게 될 수도 있다.
우리는 언제나 그리고 불가피하게 우리가 이미 아는 대상을 기준으로 새로운 대상을 이해하려고 애쓴다(이 과정을 사회적 연대 association from social, society에 빗대어 ‘개념적 연계 association of ideas’라고
부르는 것 자체가 이미 개념을 사회적 대상처럼 만드는 일종의 사회적 통념이다). 모든 유추는 도움이 된다. 다만 케네스 버크가 상기시킨 대로 유추는 주의를 특정한 방향으로 유도하는 성향이 있다. 뇌를
컴퓨터에 비유하면 뇌가 지닌 생화학적 특성과 그 특성이 구현한 상태를 간과하게 된다.
‘다시 말하기’는 ‘미끄러운 비탈’ 전략과 밀접하다. ‘다시 말하기’ 전략이 상대가 한 말 자체가 아니라 자기가 생각하는 의미로 바꾸고 그 의미를 비판하는 경우라면, ‘미끄러운 비탈’ 전략은 A를 옹호하면, 자동적으로
B, C를 지나 Z까지 이어서 옹호하는 것이다. 가령 마약 사범을 중형에 처하는 데 반대하면 아기들이 마약에 중독된 상태로 태어나도 괜찮다는 뜻이냐고 따진다. 마약 사용을 강력하게 처벌하지 않으면 임산부를
비롯한 더 많은 사람이 마약을 사용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런 오류는 너무나 흔해서 따로 한 장을 할애해야 할 정도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실제로 한 말에서 기껏해야 약간의 연관성만 있는 의미로 주의를 돌린다는
점에서 ‘다시 말하기’와 궤를 같이 한다(여기서 잠시 잘난 체를 하자면 대개 이런 논리에 대해 미끄러운 비탈을 내려가는 이미지를 떠올리지만 실은 도미노가 연이어 넘어지는 것에 더 가깝다. 논쟁의 각 단위가
분절적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자신의 입장을 마련하고 공격으로부터 방어하는 데 상당한 시간과 에너지를 투자한다. 그런 입장을 이제 와서 바꾸는 것은 그 모든 노력이 헛된 짓이었음을 인정하는 셈이 될 수 있다....
경제학자들은 특정 프로젝트에 이미 투자되어 회수할 수 없는 비용을 ‘매몰비용’이라 부른다. 일부 지적에 따르면 매몰비용은 의사결정에 상당한 영향을 미친다. 해당 프로젝트가 가망이 없다는 증거가 아무리
확실해도 투자비용이 많을수록 포기하기를 꺼려한다.
불쾌한 문화적 타자가 덜 낯설어지고 그에 따라 다소 덜 불쾌해질 때, 우리가 깨닫게 되는 것은 운명의 흐름이 달랐다면 나도 얼마든지 그들과 같은 입장에 설 수 있었다는 사실이다.
동참하지 않을 경우 입지를 잃는다면 공동체가 아니라 내부 패거리임을 깨달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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