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착각일 뿐이다, 샘 해리스, 시공사, 2017(초판 1쇄)



 우리가 ‘나’라고 부르는 느낌은 사실 착각이다. 뇌의 미로 속 깊은 곳에서 미노타우로스처럼 살아가는 자기나 자아라는 것은 없다. 또한 눈 뒤 어딘가에 올라앉아 세상을 내다보는, 우리 자신과는 별개인 어떤 존재가

몸속에 있다는 느낌은 바뀌거나 완전히 사라질 수도 있다.



 자기초월self-transcendence의 경험은 과학적 시각에서도, 철학적 시각에서도 사물이 존재하는 방식을 더 명확하게 이해했다는 뜻이다.



 만일 친한 친구가 당신에게 ‘어떻게 하면 더 나은 삶을 살수 있느냐’고 묻는다면, 아마 좋은 말은 많이 해줄 수 있겠지만 스스로 그런 식으로 살지는 못활 것이다. 어떤 수준에서 지혜란 스스로의 조언에 따를 수 있는 

능력에 불과하다.



 우리가 경험에 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가 그것에 관해 어떻게 느낄지를 전적으로 결정하는 것이다.



 우리가 하는 일은 고작 ‘원함’과 ‘원치 않음’ 사이에서 휘적대는 것에 지나지 않아 보인다. 



 순간순간 우리의 주의력을 어떻게 사용하느냐가, 우리가 어떤 사람이 될지를 크게 좌우한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이제 별 의문이 없다. 우리의 마음과 삶은 대체로 우리가 그것을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달리 

형성된다. 



 언제나 ‘지금’이다. 진부하게 들리더라도 그것이 진실이다. 그러나 신경학적 관점에서 그 말은 그다지 옳지 않다. 우리 마음은 각각 다른 시간에 투입되는 정보 층위를 기반으로 하기 대문이다. 그러나 의식적 경험의 

문제로는 이것이 진실이다. 당신 삶의 실재는 언제나 ‘지금’이다.



 우리는 경험을, 물건을, 관계를, 단지 그것에 싫증을 느끼기 위해서 갈망한다. 



 마음을 챙긴다는 것은 경험에 관해 더 명확하게 ‘생각’하는 문제가 아니라 더 명확하게 ‘경험’하는 행위다. 



 얼마나 끔찍한 꿈이든, 꿈에서 깨어나면 즉각적인 안도감이 찾아온다. 그러나 한 번에 몇 초 이상 깨어 있는 채로 머물기는 어렵다.



 영적 수행에서 세울 수 있는 현실적인 목표는 더 이상의 노력이 필요 없는 영원한 깨달음의 상태가 아니라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든지 그 순간에 자유로울 수 있는 역량을 기르는 것이다. 



 지금 이 순간에 당신이 당신인 것 같다는 유일한 증거는 당신이 당신인 것 같다는 사실뿐이다. 



 인간은 순식간에 지나가는 시각 자극을 의식적으로 지각할 수 있지만(약 30분의 1초까지도), 바로 뒤이어 차폐mask기능을 하는 다른 형태가 나오면 더 이상 그 이미지를 보지 못한다. 즉 단어와 그림이 잠재의식에

전달되고, 그 자극이 후속적으로 우리의 인지와 행동에 영향을 미친다는 의미다. 그런 예로 ‘대양’이란 단어는 ‘망치’처럼 전혀 무관한 단어가 아니라 ‘파도’같은 연관 대비어가 뒤따를 때 더 빨리 인지된다. 

 또한 정서적으로 더 비중있는 단어가 중립적인 단어보다 더 쉽게 인식되는데(‘섹스’가 ‘자동차’보다 더 빨리 인지된다), 이것으로 우리는 단어의 의미가 의식보다 먼저 인지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당신은 ‘문’이라는 단어의 의미를 배운 것을 기억하는가? 아마도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그것을 인식하고 마음에 그 의미를 불러올 수 있는가? 모른다. 이런 과정은 의식밖에서 일어난다. 



 집은 제 스스로를 고치지 못한다. 떨어지는 물을 받기 위해 아내와 내가 양동이와 샐러드볼을 잡은 순간부터 우리는 피할 수 없는 물리적 현실이 당기는 힘에 반응하고 있었다. 그러나 나의 고통은 순전히 내 생각의

산물이었다. 그 순간 필요한 것이 무엇이든, 나에겐 선택권이 있었다. 차분하게, 인내심 있게, 집중해서 일을 하든지 공황 상태로 그 일을 하든지. 실제로 우리 생애의 모든 순간은 느긋하게 대응할 것인지 불필요하게

고통받을 것인지 선택할 기회를 준다. 



 우리는 이해와 창의성에서 놀라운 위업을 달성할 수 있다. 우리는 거의 어떤 고통도 인내할 수 있다. 그러나 자신에게 말하는 것은 결코 멈출 수 없다. 



 누가 나를 바라본다는 것은 누가 나를 바라보지 않는다는 것과는 느낌부터 다르다. 나는 그 차이를 우리가 ‘나’라고 부르는 느낌의 확대로 설명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스크린으로 눈을 돌리는 순간 우리는 인류의 유전자가 예측하지 못했던 사회적 상황에 놓인다. 우리 자신이 관찰당할 위험이 전혀 없이, 그들과 눈이 마주치는 시점에도 타인의 상세한 얼굴 표정과 행동을 지켜볼 수

있는 것이다. 영화와 텔레비전은 대면 만남이라는 원시적 상황을 마법같이 바꿔놓았다. 



 부모라면 누구나 자녀가 혼잣말을 하며 점차 언어 능력을 발달시켜가는 모습을 본다. 이런 혼잣말은 마치 그것이 실제 ‘대화’인 것처럼 전 생애에 걸쳐 이어진다. 이런 대화는 이상하고 불필요하다. 왜 우리는 단순히

우리 자신으로서가 아니라 우리 자신과의 ‘관계’에서 살아야 할까? 왜 ‘내가’와 ‘나에게’가 서로 상대가 되어 주어야 할까?



 선글라스를 가지러 방을 가로질러 가면서 ‘맞아, 거기 두었지’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이 생각을 누구에게 하고 있는가? 심지어 그 생각을 소리 내 말하기까지 한다.



 슬픔을 인식하는 ‘그것’은 슬프지 않다. 두려움을 인식하는 ‘그것’은 두렵지 않다. 



 명상 수행을 하면서 맨 처음 알게 되는 것은 그 어느 것도 본질적으로 지루하지 않다는 사실이다. 실제로 지루함은 단순히 주의력이 결핍된 것에 지나지 않는다. 







'others' 카테고리의 다른 글

탈출하라 - 로버트 링엄  (0) 2019.02.04
내셔널지오그래픽 코리아 2019년 1월  (0) 2019.02.04
새로운 부의 법칙 머니  (0) 2018.12.31
남자는 불편해 - 그레이슨 페리  (0) 2018.12.30
죽는 게 뭐라고  (0) 2018.12.27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