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꾸는 기계의 진화 뇌과학으로 보는 철학 명제, 로돌포 R. 이나스, 북센스, 2019(복간본 1쇄 발행)

 

 

 

 과학적 관점에서 마음의 본성을 탐험할 때 기본이 되는 첫 번째 단계는 마음은 어떤 극적인 개입의 결과로 느닷없이 나타난 것이라는 전제를 뿌리치는 일이다. 마음의 본성은 그것의 기원과 발달 과정을 기초로 끝없이 작용하고 있는

생물학적 시행착오의 메커니즘을 가지고 있다.

 

 

 안면실인증prosopagnosia은 신경이 손상되어 사람의 얼굴을 알아보지 못하는 상태이다. 미묘한 얼굴 특성을 비롯해 얼굴의 각 부분들은 알아볼 수 있지만, 전체적인 통일체로서의 얼굴은 알아볼 수 없다. 뿐만 아니라 안면실인증 

환자의 꿈에 나오는 사람들은 얼굴이 없다. 

 

 

 뇌가 예측을 수행해야 하는 두 가지 근본적인 이유를 논의했다. 첫째, 행동적 수준에서 활발하게 움직이는 모든 생물은 외부 세계와 의미 있는 방식으로 상호작용하기 위해 예측 능력을 가져야만 한다. 둘째, 지능과 활발한 운동을

통해 외부 세계와 빠르게 상호작용하지 않는다면, 그 생물의 삶은 필연적으로 지금보다 더 위험해질 것이다. 

 

 

 뇌가 예측에 의해 작용해야만 하는 두 번째 이유는, 에너지를 보존하여 운동 조절의 엄청난 부담을 덜기 위해서이다. 운동은 그것이 실행되는 동안에는 원활하고 연속적으로 보이지만 사실은 연속적이지 않다는 게 분명해졌다. 운동은

줄곧 불연속으로, 박동으로, dt 미리보기 기능 간격으로 만들어지고 조절된다. 이 고도로 주기적인 조절 신호는 근육 안에 8~12Hz의 생리학적 떨림으로 반영된다.

 

 

 뇌가 예측을 하려면 공을 제대로 때리기 위해 시간과 공간 안에서 테니스 라켓을 움직일 때처럼 초점을 빠르고 극적으로 재구성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생각해볼 때, 뇌는 어느 시점에서나 ‘오직 이 순간에 무엇을 아는 것이

중요한가what-is-important-to-know-at-this-moment-only’를 기초로 작용한다는 게 분명해진다. 실제로 선택의 여지가 없다. 뇌는 다른 일을 할 시간이 없는 것이다!

 

 

 우리는 아무리 훈련하고 노력해도 10Hz보다 훨씬 빠른 운동은 할 수 없다. 특정한 운동으로 근육량을 늘릴 수는 있지만, 몸 안에 있는 개별적인 근육 섬유들의 수는 바꿀 수 없고 오직 근육의 부피를, 그것도 어느 선까지만 늘릴 수 있다.

이 규칙은 뇌에도 적용할 수 있다. 즉, 신경계의 본질적 구성은 가소성과 학습을 통해 강화될 수 있지만 미리 정해진 점까지만 그럴 수 있다. 

 

 

 마침내 동물이 발생했을 때 예정된대로 진정한 의미의 ‘공동죽음corporate death’이 창조되었다.

 

 

 단세포 유기체는 분명히 파괴될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그것이 평범하게 그 자체로 ‘죽는’것이 아니라, 단지 분열할 뿐이라는 사고의 유희를 해볼 수 있다. 오늘날 살아 있는 모든 아메바는 수천 년에 걸쳐서 그저 수없이 둘로 나뉘었을 뿐 

한 번도 정말로 죽은 적이 없었다는 뜻이다.

 

 

다세포 유기체에서는 상황이 힘들어진다고 각 세포가 집단에 대한 유대를 깨고 달아날 수 없다. 그 능력은 이미 청산된 것이다.

 

 

 동물 발생을 위한 두 번째 선행조건은 꼼짝 못하게 붙잡아서 채워넣은 굶주린 세포들에게 고에너지의 연료를 배달하기 위한 체계를 개발하는 것이었다. 그 체계에는 매우 밀집된 세포 집단에게 순환계를 통해서 질좋은 영양분을 공급할

수 있는 산화적 물질대사oxidative metabolism와 소화제가 필수 단계로 포함되었다.

 

 

 뇌는 그 본성과 작용에 있어서 근본적으로 닫혀 있다. 어떤 감각으로도 뇌는 직접 관찰할 수 없다. 뇌는 보이지도 소리를 내지도 콩닥거리지도 않으며, 부풀었다 줄어들었다 하지도 않고, 맞아도 아픔을 느끼지 못한다. 뿐만 아니라 뇌는

우리가 다른 사람의 아픔을 공감하거나 경외심을 가지고 우주를 관찰할 때처럼 육체에 정박하지 않고 먼 곳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반복해서 말했듯이 뇌는 실제 묘사기이다. 그 계가 닫혀 있다. 따라서 아주 다르다는 말의 의미는 그게 ‘모든 것everything’을 표현하는 또 다른 방식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뇌 활동은 다른 모든 것을 위한 은유metaphor이다.

원하든 원치 않든 간에 인간은 기본적으로 현실 세계의 가상 모형을 건설하는 꿈꾸는 기계이다. 그것이 아마도 700그램의 질량과 14와트의 ‘어두침침한’ 전력만을 가지고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일 것이다.

 

 

 나무는 활발하게 움직이지 않는다. 그것이 나무에게 뇌가 필요하지도 존재하지도 않는 이유이다. 나무의 생존은 예측에 달려 있지 않은 것이다.

 

 

 활발하게 움직이는 생물의 경우 보기, 듣기, 냄새 맡기와 같은 ‘원거리 지각’은 외부 세계의 협상을 통해 예측 능력을 키워준다. 위협을 확인할 때 반드시 외면의 존재를 통해 만지거나 맛보아야 한다면, 그 생물은 위협을 사후에야

확인하기 십상이다. 

 

 

광수용체 뉴런은 붙잡히는 광자의 수를 ‘셈’하여 빛의 세기를 측정한다. 광자가 붙잡힐 때마다 광수용체의 막 전위가 약간씩 변하기 때문에 빛은 점진적인 막 전위 단계로 측정된다.

 

 

 우리는 튀는 광자들로부터 외부 세계의 상을 만들도록 진화한 눈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상이란 무엇인가? 상은 실재의 단순화이다. 뇌는 실재를 단순화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 분야를 연구하는 사람 중에는 동물에게 주관적 느낌(감각질, qualia)이 있다는 걸 판단할 수 없기 때문에, 증명이 될 때까지는 주관성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정말 그러한지를 입증할 책임은 동물의 주관성을

부인하는 사람들에게 있다.

 

 

 잘 때는 왜 듣지 못할까? 신호가 일정한 처리 단계까지만 도달하고 그 이후로는 뇌가 무시하기 때문이다. 수면 상태에서는 내부 맥락이 우세해서 뇌가 감각입력을 내부 맥락 안으로 통합시키지 않는다. 잠자는 동안 뇌의 내부 맥락은

아주 큰 소리를 제외한 어떤 청각 정보에도 중요성을 부여하지 않는다.

 

 

 시간 영역에서 외부 실재와 내부 실재의 분열된 성분들을 단일한 구조로 결합하는, 시간적으로 결이 맞는 이 사건이 바로 ‘자아self’의 실체이다. 뇌의 입장에서는 편리하고 지극히 유용한 발명품이다.

 

 

 자아는 시간 결맞음에 의해서 단일하게 지각되는 복합 구조로 형성된다. 시간 결맞음이 하나의 자리(중심)를 만들어냄으로써 뇌의 예측 기능이 조화로운 방식으로 작동하게 한다. 따라서 주관성 혹은 자아는 시상과 피질 간의 대화에

의해 생겨난다. 다시 말해서 결합 사건이 자아의 토대인 것이다.

 

 

 모든 뇌 기능 중에서 예측은 가장 궁극적이고 본질적인 기능이다. 어떻게 오직 하나의 예측 기관만이 발달했을까? 유기체가 세계와 상호작용할 수 있도록 판단을 내리는 예측의 자리가 하나 이상이라면 타이밍이 맞지 않으리라는 걸

직관적으로 알 수 있다. 머리는 이것을 예측하는데 꼬리는 다른 것을 예측하는 것만큼 불리한 일이 없을 것이다! 최고의 효율을 위해서라면 예측은 확고한 주거지와 함께 기능적 연결성을 제공해야 한다. 즉 외부 세계와 상호작용하는

뇌 전략의 수많은 작용과 반작용에 대해 어떤 식으로는 집중되어 있어야 한다. 우리는 이 예측의 중심을 이른바 ‘자아’라는 추상 개념으로 알고 있다.

 

 

 ‘나는’ 다음에 무엇이 오든. 그러나 물리적인 ‘나’의 존재란 없다는 걸 알아야 한다. 그것은 그저 특별한 정신 상태일 뿐이다. 우리가 ‘나’ 혹은 ‘자아’로 부르는 것은 어쩌다 생겨난 추상적 실체에 불과하다.

 

 

 첫 번째로, 엉클 샘Uncle Sam이라는 개념이 있다. 신문에서 ‘엉클 샘, 베오그라드를 폭격하다’라는 기사를 읽을 때 모든 사람은 미국 군대가 유고에 배치되었다는 뜻임을 이해한다. 그러나 어느 곳에도 엉클 샘이라는 실체는 없다.

그것은 상징으로서 존재를 함축하는 편리한 개념이지만, 구성 요소가 없는 범주이다. 복잡한 여러 성분으로 구성된 미국이라는 실재를 상징하는 엉클 샘의 개념처럼, 우리가 연구하고 고민하는 ‘나’라는 소용돌이는 전역적인 사건을

상징하는 편리한 단어에 지나지 않는다.

 

 

 ‘자아’라 불리는 발생된 추상 개념은 근본적으로 감각의 2차적 특질과 다를 게 없다. 자아는 본질적인 중추신경계 의미론에서 나온 발명품이다. 그것은 중추신경계라는 닫힌계 안의 끌개attractor, 즉 실제 존재하지 않으면서 관련 없는

부분들을 연관시키는 추진력인 하나의 소용돌이vortex로 존재한다. 

 

 

 자아, 즉 예측의 중심은 항상 변하는 세계 안에서 몸이 완수해야 하는 모든 묘기를 매순간 조화롭게 편성할 수 없다. 그러므로 잘 정의된 운동 패턴의 집합인 고정행위패턴fixed action pattern, FAP, 즉 미리 만들어진 ‘운동 테이프’를

활용해야 한다. 스위치를 켜면 걷기, 삼키기, 새의 지저귐과 같은 잘 정의되고 조화된 운동이 나온다.

 

 

 나는 감정이 고정행위패턴에 대한 전운동의 관계처럼 행위에 대한 ‘전운동’이라고 간주한다. 운동을 실행하기 전에 근육이 긴장하는 것처럼 사람은 어떤 행위를 하기 전에 감정이 생긴다. 다만 감정을 조절하는 변수는 근육 활성화

수준인 근육 긴장과는 달리 매우 다양해서 악명이 높다.

 

 

 사실 어떤 통증도 그 위치를 알아낼 수는 없다. 손가락을 베었을 때 오는 통증은 위치를 알 수 있을 것 같지만, 그것은 단순히 통증, 감정 상태, 일반적인 촉각 자극이 공동으로 활성화된 것이다. 통증의 불쾌함은 뇌에 의해 생겨나는 

감정 상태이지 특별한 신체 부위에 존재하는 게 아니다.

 

 

 의식은 불연속이다. 초점이라는 총체적 전략이 의식의 낭비를 막기 위해 그렇게 명령을 내린다.

 

 

 우리에게는 우리를 집중과 선택으로 인도할 수 있는 장치가 필요하다. 그것이 의식이다! 

 

 

 단일한 사건에서 오는 정보를 가지고 조종하는 건 더 쉽다. 그러한 조종은 항상 변하고 있는 통제 시점에서 변수들의 집합을 끊임없이 고려하는 것보다 더 강력하게 작용한다. 이것이 바로 예측의 자리인 의식이 하나밖에 없는 이유이다.

선택이 필요없는 체계에는 의식이 필요 없다. 이런 체계에서는 실행 속도의 문제와 마찬가지로 지각과 운동 관점 모두에서 과잉완성의 문제가 절대적으로 중요해진다.

 

 

 긴 동물의 몸은 기본적으로 동전을 눕혀서 쌓은 모양으로 만들어진다. 여기서 각 동전을 보조하는 신경적 수단은 해당 분절에 관해서는 알지만 상대적으로 그 외의 것은 거의 모르도록 구성되어 있다. 이 분절들로 완전하게 작동하는

한 마리 동물을 만들기 위해서는 분절적이지 않은 신경계가 있어야만 한다. 이 부분은 많은 분절들을 한데 모아 통일된 전체를 만들어낼 수 있다. 위에서 말했듯이 우리는 이것을 추상 기능의 시작으로 여긴다.

 

 

 보편성을 알게 되는 것은 보편성을 모르는 것에서 나왔음에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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