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소한 부탁, 황현산, 난다, 2018(초판 1쇄)

 

 

 

 좋은 문체를 지닌 지방 출신 작가의 글을 살펴보면 그 문체가 그의 방언과 표준어의 교섭 속에서 성립되었음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도 있다.

 

 

 강원도에 가면 쉽게 먹을 수 있는 곤드레밥을 고려엉겅퀴밥이라고 부를 수 없듯이, 곤반불레된장국을 별꽃된장국이라고 고쳐 말할 수는 없다. ‘곤드레밥’과 ‘곤반불레’를 표준어로 인정하고, 각기 ‘고려엉겅퀴의 어린 잎을 넣고 지은 밥’,

‘식용할 수 있는 별꽃의 새순’ 정도로 뜻을 달아주면 그만이다. 공공의 언어는 게으를 수 없다.

 

 

 섣부른 근대주의자들의 주장이나 설명 방식에는 이해가 쉽지 않은 것들을 가난이나 몸매함의 탓으로 돌려 농어촌을 도시의 식민지로 삼으려는 음모가 종종 숨어 있다. 그 음모 속에서 삶의 깊은 속내는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다고 

자만하는 자들의 천박한 시선 아래 단일한 평면이 되어버린다. 나름대로 삶의 중심이었던 자리들이 도시의 변두리로 전락하는 것은 그다음 수순이다. 

 

 

 대통령이 눈물을 흘리고 방송이 그 얼굴을 클로즈업해서까지 증명하려 했던 ‘진정성’인데, 정작 이 말은 국립국어원에서 발간한 <표준국어대사전>에 올라 있지 않다. 그렇게도 빈번하게 사용된 이 낱말이 아직 공식적으로는 한국어가

아닌 셈이다. 

 이 낱말은 처음 외국어 사전 편찬자들이 서양말 ‘authenticity’ 대응할 한국어를 찾다가 만들어낸 말이다.

 

 

 제 나라 글자와 말을 기리고 가꾸기 위해 기념일을 제정한 국가는 많지 않을 것이다. 한국이 한글날을 만들어 그날 하루만이라도 나라의 언어생활에 특별한 관심을 나타내는 것은 우선 한글이 오래오래 기림을 받아야 할 우수한 

문자이기 때문이지만, 제 나라의 말과 글을 마음놓고 쓰지 못했던 한 시기와 관련된 역사적 한에도 그 이유가 있을 듯하다… 언어는 사람만큼 섬세하고, 사람이 살아온 역사만큼 복잡하다. 언어를 다루는 일과 도구가 또한 그러해야

할 것이다. 한글날의 위세를 업고 이 사소한 부탁을 한다. 우리는 늘 사소한 것에서 실패한다.

 

 

 우리는 모진 사람들이 되었고 한편으로는 피곤한 사람들이 되었다. 그래서 제 사는 자리를 더욱더 섬으로 만들려 하고 거기에 철벽을 치려 한다.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혈기왕성한 젊은이들의 도덕심은 육체가 쇠해가는 사람들에게 늘 염려스러운 것이어서, 윤리 교육을 염두에 둔 인성 교육의 주제는 누가 그 말을 꺼내기만 해도 그 사람을 훌륭한 사람으로 보이게 한다.

 

 

 상투적 글쓰기는 소박한 미덕을 지닌 것처럼 보이지만 때로는 식민 세력에 동조하는 특징을 지닌다. 자신의 삶에 내장된 힘을 새롭게 인식하려 하지 않고, ‘산다는 것이 늘 그런 것’이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사르트르의 말을 빌린다면, 창조의 의지는 정복의 의지와 같다. 창조는 우리가 손님으로 살고 있는 이 세상에 어떤 풍경 하나를 만들어 덧붙임으로써 제한된 시공에서나마 이 세상의 주인으로 행세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어떤 것을 산이라 부르고 어떤 것을 들이라 부르고, 그렇게 말로 분별되는 세계는 그 분별하는 말만큼 확실한 것이 아니다 .말에는 그렇게 부르기로 하는 정식 계약과 (어쩔 수 없어서) 그렇게 부르기로 양보하는 이면 계약이 있다.

 

 

 “… 다리미를 대신하는 끝없는 다듬잇방망이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그녀들이 빨고 다듬는 것이 하얀 새벽 그 자체인 것처럼.”

 

 

 죽음에서까지도 천민들은 중요한 일을 맡을 수 없다.

 

 

 “희망은 길과 같은 것이다. 처음부터 땅 위에 길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사람들이 많이 다니다보면 길이 만들어진다.”

 

 

 진보주의를 삶의 방식으로만 말한다면 붕행한 세계에서 행복하게 살기다.

 

 

 박근혜의 탄핵이 결정되었을 때, 사람들은 이런 말을 했다. “운동권 전체가 반세기의 노력으로도 깨뜨리지 못한 박정희 신화를 그 딸이 삽시간에 깨뜨렸다.”

 

 

 물과 나무 간에 어찌 소통이 없겠는가. 바람과 흙 사이에는 어찌 소통이 없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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