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ewPhilosopher, VOL.13
부조리한 삶 속에서 목표를 갖는다는 것
“인생의 선험적 의미란 없다. …… 인생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당신이고 당신이 선택한 의미가 곧 인생의 가치다.”
- - 장 폴 사르트르
알베르 카뮈도 비슷한 말을 했다. 실존주의자이기를 망설인 실존주의자였던 카뮈는 ‘인생의 의미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은 없다고 말했다. 카뮈는 삶은 부조리하며, 인간은 제우스의 저주를 받은 시시포스 왕처럼 언덕 꼭대기로 끊임없이 바위를 밀어 올려놓고는 그 바위가 밑으로 굴러떨어지는 것을 지켜봐야 하는 운명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사르트르가 그러했듯 카뮈 또한 인생이 부조리할지라도 우리가 그것의 의미를 만들어낼 수 있다고 여지를 남겨두었다. 카뮈는 이렇게 말했다. “누군가는 시시포스가 행복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시대와 함께하며 행동이나 분노 또는 저항으로 역사를 지배하려는 사람이 상아탑으로 물러난 사람보다 훨씬 더 풍부하고 심오하게 세상과 연대한다.”
- - 시몬 드 보부아르
제레미 벤담은 “자연이 인류를 고통과 쾌락이라는 두 통치자의 지배 아래 두었다”고 말했다.
행복은 목적을 따르는 과정에서 부수적으로 얻게 되는 것이지 목적 자체가 아니다.
우리가 인생에서 무엇을 기대하느냐보다 인생이 우리에게 무엇을 기대하느냐가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우리는 스스로 깨우쳐야 했고 절망에 빠진 사람들에게 가르쳐야 했다.
“인간은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지만, 하고 싶은 마음을 만들어낼 수는 없다.”
- - 아르투어 쇼펜하우어
“당신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두 날은 태어난 날과 태어난 이유를 알게 된 날이다.”
- - 작자 미상
예술 철학사는 사람들이 예술이란 본질적으로 무엇인지를 완벽하게 정의하려다 실패한 역사다. 예술은 대상을 묘사하고, 감정을 표현하며, 양식에 특별히 주의를 기울인다. 하지만 철학자가 단어들로 이루어진 거미줄로 예술을 포착했다고 생각할 때마다, 그 반대급부로 새로운 유형의 예술이 튀어나온다. 예술가들에게 예술이란 세계를 묘사하는 것이라고 말하면, 추상 예술이 등장할 것이다. 예술은 아름다워야 한다고 말하면, 이들은 추한 작품을 만들 것이다. 만약 예술은 실체를 갖추고 전통 매체를 이용해야 한다고 말하면, 이들은 개념 예술conceptual art을 생각해낼 것이다.
토마스 E. 힐 주니어는 1979년에 발표한 논문 <상징적 시위와 계산된 침묵symbolic Protest and Calculated Silence>에서 철학적 깊이와 실용적 의미를 함축한 시의적절한 질문을 던졌다. “이성적으로는 시위를 통해 불의가 종식된다고 기대할 수 없을 때도, 사람들은 왜 심각한 불의에 맞서 시위를 벌이는가? 더 나아가 시위 참가를 이유로 해를 입을 수 있는데도 사람들은 왜 시위를 벌이는가?”
수십 년 후 버나드 박슬은 시위가 스스로를 존중하는 하나의 방식이라는 의견을 덧붙이면서 자존감 논의를 이어 나갔다. 박슬은 자아존중감이 개인의 품위를 지키는 데 기여하는 안정된 가치관이라고 주장했다. 사람들은 자존감을 잃고 싶지 않을뿐더러, 자존감을 증명하고 싶어한다.
자유의지에 관해 글을 쓴 여러 저명한 과학자들을 포함해 많은 사람이 자기가 원하는 답에 맞춰 그 개념을 이해하고 있다. 이들은 우리에게 있거나 없는 것으로 자유의지를 정의한다. 오랫동안 나는 철학과 현실에서 중요한 각양각색의 자유의지가 특별하지만 광범위한 의미에서 도덕적 책임에 필요하다고 주장해 왔다. 여기서 도덕적 책임은 일반적으로 ‘기본적인 응분의 몫basic desert’이라는 개념과 구별되며, 비난이나 칭찬, 처벌이나 보상을 받을 자격이 있는 행위자에게 필요한 통제력으로 정의된다.
이런 식으로 이해할 경우, 자유의지란 하거나 하지 않은 결정이나 행위에 응당 따라오는 판단이나 태도, 대우(억울함, 분노, 도덕적 분개, 보복성 처벌 등)를 합리화하기 위해 행위자가 반드시 소유하는 권력이나 능력이 된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약간의 아이러니만 있으면 다른 모든 결점을 보완하고 세상에서 꽤나 존경받으며 살아갈 수 있으며, 인생에 대한 관점과 세상에 대한 이해가 있는 교양 있는 모습을 부여받고, 초심자들에게 광범위한 지식인 계층의 일원으로 비춰져 성공을 거둘 수 있던 시절이 있었다.
학자 겸 비평가인 벨 훅스는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은 당신이 어떻게 느끼느냐의 문제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의 견해에 따르면, 사랑은 당신이 행하는 것이다. 사랑은 수동적이기보다는 능동적이다. 우리가 사랑을 하기로 선택한 것이지, 사랑이 그냥 우리에게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온라인 데이트의 시대에는 우리의 행복이 점점 줄어든다는 의견이 종종 대두되는데, ‘선택 과잉choice overload’이 원인이라는 주장이다. 언제라도 바꿔치기할 수 있는 더 많은 프로필이 있고, 선택할 더 많은 옵션이 남아 있는 것이다. 이럴진대 우리가 어떻게 현재 가진 것에 충분히 만족할 수 있겠는가?
연애 상대가 어떻게 구매와 비슷할 수 있을까? 연애 상대를 일종의 재산으로 취급하는 뿌리 깊은 이데올로기를 통해 이 회로가 완성된다. 이러면 사랑이 소유권과 유사해진다. 이러한 이데올로기는 더 나은 상대로 ‘갈아타기’ 같은 개념에서도 드러난다. 그리고 연애 상대에 대한 소유적인 감정이 정당화되는 개념에서도 드러난다. 같은 맥락에서 이 이데올로기는 사랑이 반드시 일부일처제라는 생각을 강조한다. 일단 내가 당신을 ‘소유하면’ 아무도 당신을 ‘훔쳐 갈’ 수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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