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omankind KOREA, VOL15, 딸에 대하여

 

 

 

 [좌뇌 해석자]

 나이바우어는 좌뇌가 현실을 해석하는 역할을 하며, 이 해석자는 종종 “완전히, 전적으로 틀렸다”고 말한다.  

 

 “지난 40여 년간 진행된 추가 연구는 좌뇌가 비록 사실이 아니더라도 진행되는 상황에 대한 설명을 만들어내는 데 탁월하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진실은 여러분의 좌뇌가 평생 여러분의 현실을 해석해왔다는 것이다. 그리고 여러분이

평범한 사람이라면, 절대 이 사실의 완전한 의미를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타인이 내 몸에 거처할 때]

 엄마는 내게 타인일 수 없는 타인이다. 내 몸에 ‘엄마’로 상징되는 세상의 모든 외부가 다 들어앉은 것 같다. ‘엄마’는 너무 복잡하고 깊은 역사이기 때문이다.

 

 내 부모는 죽음이 그들을 갈라놓을 때까지 싸웠다. 내가 다섯 살 즈음 기억력이 있을 때부터 두 사람은 74세(엄마), 81세(아빠)로 돌아가실 때까지 싸웠다. 기싸움과 상호 폭력이 오갔다. 장녀인 나는 꼬맹이 시절부터 두 사람 사이의

메신저이자 볼모였고 대학에 들어간 이후엔 가장이었다… 나는 두 사람이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단지 그들은 결혼 생활에 어울리는 사람이 아니었다. 사실 많은 이들이 결혼 제도와 맞지 않지만 관행적으로 ‘정상 가족’을

꾸린다.

 

 인간의 몸은 사회적 관계망으로 연결되어 있지만, 몸의 개체성 때문에 고통의 소통과 공감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이 원리와 별도로, 우리의 몸social body은 내외부가 따로 없다. 언제나 무엇인가가 들락날락거린다. 그것이 삶이고, 

출/입이 멈출 때가 죽음이다.

 우리의 몸에는 ‘주님, 기억하고 싶지 않은 외상, 중독성 물질, 잊고 싶은 사람, 사랑하는 사람, 욕망’ 등 다양한 외부가 들어와 있고 이로 인해 인간은 변화한다.

 

 

 [엄마를 끝낸 엄마]

 나는 엄마를 싫어했다. 엄마는 내가 아주 어렸을 때부터 나를 착취하는 사람이었고, 오빠보다 뒤에 서 있기를 지나치게 종용해온 억압의 주체였다. 나는 자랑스러운 딸이어야 하되 오빠보다 더 자랑스러우면 안 되었다. 아주 좁은

영역 안에서 적당히 운신하는 법을 나는 일찌감치 체득했다. 엄마는 평생 미안함과 미안할 것 까지는 없음을 왕복하며 나를 대했다. 그걸 나에게 굳이 다 말하고 굳이 다 이해 받으려 했다. 엄마의 고백들을 나는 주로 농담으로

웃어넘겼고, 아주 드물게는 분노를 적나라하게 표출했다. 그럴 때마다 엄마는 아주 징그러운 것을 쳐다보는 표정을 했다.

 

 

 [딸은 언제 딸의 역할을 마칠 수 있는가]

 K-도터의 불치병이 하나 있는데, 어머니가 겪는 불행의 원인을 자신과 연결지어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나의 존재가 어머니 삶에 행복을 더했다는 확신을 갖기 어려워한다는 자존감의 문제를 차치하고서도, 자신의 

‘남은 생’을 어머니로부터 독립한 개인으로 생각하기 어렵게 한다. 딸이 경험하는 최초의 역할모델이 어머니라는 점, 어머니가 (어머니가 되느라 이루지 못한) 기대를 투사하는 대상이 딸이라는 점은 이 둘의 관계를 멜로드라마 혹은

서스펜스의 주인공으로 만들곤 하는데,

 

 

 [고독을 경험할 때 시간은 멈출 수 있다]

 분주함과 생산성에 대한 우리의 문화적 집착은 시간과 관련이 있다. 쓰다, 아끼다, 낭비하다, 잃다, 죽이다 등 우리가 ‘시간’ 명사에 붙이는 동사들은 시간의 흐름에 대한 불안을 나타낸다. 우리는 시간의 인질이다.

 

 

 [실존주의 수업]

 실존주의자들은 자신들이 고통을 겪었기 때문에 인간이 고통을 겪도록 내버려두는 데 탁월하다.

 

 

 [적극적인 기다림]

 “기다림은 별로 인기가 없다.” 20세기 대표적인 영성가 헨리 나우웬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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