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로토닌, 미셸 우엘벡, 문학동네, 2020(전자책 발행)
행정기관 입장에서 좋은 시민이란 죽은 시민이다.
프랑스에서 매년 만 이천 명 이상이 가족을 등진 채 사라지기를 택했고, 때로는 세상 반대편 끝에서, 때로는 같은 도시에서 새 삶을 꾸렸다.
그녀가 여성으로서의 위상을 유지하는 데 꼭 필요로 하는 물품들의 수는 가히 경악스러웠다. 여자들은 대부분 모르겠지만, 남자들은 그런 것들을 마뜩지 않아 할뿐더러 심지어 역겨워하고(흔히 열거되는 여성으로서의 결함에 대해
일반적인 마초 남성들이 기본적 수준의 관대함을 보인다 해도) 여자들의 끝없는 인위적인 치장을 비윤리적이라고 판단한다. 결국 남자들은 그런 여자들을 보며 인위적인 치장을 끝없이 해야만 미모가 유지되는 불량품을 소모한
기분에 사로잡히고 만다.
무엇보다 세로토닌은 자아존중감과 그룹 내 타인의 인정과 관련이 있는 호르몬으로, 한편 주로 위장에서 생성되는 물질이며 아메바를 비롯한 다수의 생물체들에게서도 발견되었다. 대체 아메바가 어떤 자아존중감으로 뿌듯해할 수
있다는 것인지? 또 그룹 내에서 어떤 안정을 받는다는 것인지? 결국 의학기술은 여전히 모호하고 막연한 분야이며, 항우울제는 우리가 정확한 원리를 모르는 채로 우리의 체내에서 작용하는(또는 작용하지 않을 수도 있는) 수많은 약물
중 하나라는 결론만이 점차로 굳어졌다.
우리는 세상을 구할 수도 있었다. 한쪽 눈을 한 번 찡긋하는 것으로, 인 아이넴 아우겐브리크(순식간에) 세상을 구할 수도 있었으나, 우리는 그러지 않았다. 아니, 내가 그렇게 하지 않았고, 우리의 사랑은 승전보를 울리지 못했으며,
나는 사랑을 배신했다. 잠을 이루지 못하는 밤이면, 다시 말해 거의 매일밤, 나는 나의 빈곤한 머릿속에 울려퍼지는 케이트의 자동응답기 소리를 듣는다.
‘유포르노’는 유튜브가 음악산업을 무너뜨린 것보다 더 빠르게 포르노산업을 무너뜨릴 터였다.
어쩌면 나는 일종의 대안현실을 창조하여 시간의 갈림길로 거슬러올라가 삶을 추가로 대출받으려던 것은 아니었을까. 어쩌면 지난 세월 동안 그 대출된 삶이 이곳에 숨어 있었던 것은 아닐까.
양계장에 발을 들이면 우선 그 끊임없이 들려오는 꼬꼬댁 소리에 충격을 받고, 이어서 일상적으로 공포에 질려 있는 닭들의 눈빛에 충격을 받는다. 공포에 사로잡힌 그 이해불가의 시선, 어떤 동정도 요구하지 않고 그럴 능력조차 없으며
단지 영문을 몰라 하는몰라하는 시선, 자기들에게 부과된 생존 조건에 영문을 몰라하는 시선이었다.
이미 엘뵈프를 포함하여 양계장 여러 곳을 견학할 기회가 있었고, 엘뵈프는 그중에서도 최악이었으나, 모두가 그러하듯 나 또한 인간 공동의 비열함을 발휘해 이내 그 현실을 잊을 수 있었다.
신은 졸렬한 시나리오 작가다. 나는 거의 오십 년을 살아오며 그 확신을 굳히게 되었다.
아무튼 조수간만은 살아오는 동안 흔치 않은 경험이었고, 육지를 뒤덮으러 조용히 밀려올라오는 저 거대한 액체를 느껴보는 건 신기한 일이었다.
꿈속에서 나는 엉거주춤하게 누워 쉬고 있었다.
사람들은 스스로 불행의 메커니즘을 만들어낸 뒤 의미를 최대로 부풀리고, 그렇게 메커니즘은 하릴없이 계속해서 돌아간다. 질병이 개입하면 작동 오류나 결함이 생기지만 계속해서 돌아간다. 끝까지, 마지막 순간까지.
사람들은 절대 남의 충고를 듣지 않는다. 사람들이 충고를 구하는 것은, 무엇보다 그 충고를 따르지 않기 위해서이고, 또한 그들이 파멸과 죽음의 소용돌이에 들어섰다는 것을 외부의 목소리로 확인받기 위해서이다. 그들에게 남들의
충고는 정확히 주인공에게 나락과 혼돈의 길에 들어섰음을 확인시키는 비극의 코러스 역할을 할 뿐이다.
폐가엔 아직 깨뜨릴 유리창이 남아 있었다.
따사롭고 눈부신 햇살에 호수는 환히 빛났고 숲은 반짝였다. 바람은 신음소리를 흘리지 않았고, 물도 소란스럽지 않게 고요히 흘렀다. 자연은 겨의 모욕적일 만큼 공감 능력이 결여된 듯했다.
“우리의 심장이 한번 수확을 맛보면/사는 것은 고통이 된다”라고 보들레르가 보다 적확하게 쓴 바 있다.
채널을 하나씩 돌려보며 나는 천천히 취해갔다. 계속해서 요리 프로그램들만 이것저것 나오는 느낌이었다. 그동안 요리 프로그램들이 굉장한 비중으로 증가했고, 그러는 동안 에로물은 대부분의 채널에서 점차 자취를 감추었다.
그 우스꽝스러운 오스트리아인의 용어를 빌리자면 프랑스와 어쩌면 서구 전역은 분명 구강기로 후퇴하는 중이었다.
이 동네의 환경은 나의 그런 바람에 거의 이상적으로 부합했다. 이 아파트 단지에 산다는 건, 어디에도 살지 않는 것이었다.
지난날 일어난 모든 일들은 영원히 일어난 것이고, 이제야 나는 그것을 알았으나, 그것은 닫힌 영원, 닿을 수 없는 영원이었다.
나는 수혜를 입어본 적이 거의 없었고, 역으로 내가 베풀 생각도 거의 없었다. 선의는 내 안에서 자라나지 않았고, 심리학적 발달 과정을 겪지 못했다.
그것은 반으로 쪼개지는 작고 하얀 타원형 알약이다.
그것은 무언가를 창조해내지도 변화시키지도 않는다. 다만 해석을 가할 뿐이다. 결정적이었던 것을 한시적인 것으로 만들고, 필연적이었던 것을 우연한 것으로 만든다. 그것은 생을 새롭게 해석할 수 있게 해준다. 덜 다채롭고, 보다
인위적이며, 어떤 경직성으로 점철된 방식으로, 어떤 형태의 행복감도 주지 않고, 실질적인 안도감조차 보장하지 않는다. 그것의 기능은 다른 차원의 문제다. 바로 삶을 의례적으로 행해야 하는 일들의 연속으로 변형시켜 변화를
유도해내는 것. 그것은 처음엔 인간이 살아갈 수 있도록, 적어도 죽지 않도록 해준다. 일정 기간 동안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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