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진보인데 왜 보수의 말에 끌리는가?, 조지 레이코프, 엘리자베스 웨흘링, 생각정원, 2018(전자책 발행)

 

 

 사람들은 물가가 올랐다거나 내렸다고 말합니다. 주식이 천정부지로 솟거나 바닥을 친다고 표현하죠. 이 은유에 근거할 때, 많음은 공간상 더 위쪽으로 해석되고 적음은 공간상 더 아래쪽으로 해석됩니다. 이와 대칭되는 정반대의 사상은 없습니다. 많음을 아래로 해석하는 은유는 없다는 뜻입니다.

 

 우리의 사유에서 두 국가의 전투는 두 국가의 물리적 대결로 이해됩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국가는 서로 물리적인 전투를 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언어와 사유에서 은유를 피하기란 불가능합니다. 우리는 뇌의 물리적 실재를 무시할 수 없어요. 어느 날 잠에서 깨어 “난 더 이상 은유를 통해 사유하지 않을 거야”라고 말할 수는 없죠. 은유적 사유는 자동적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사람들이 대부분의 시간 - 98퍼센트의 시간 – 동안 자신이 무엇을 생각하는지를 알지 못한다고 말해도 되니까요. 대략 그 정도가 우리에게 여전히 무의식적으로 남아 있는 인간 사유의 비율입니다.

 

 보수주의자들은 쉬지 않고 가정의 가치에 대해 얘기했습니다. 가정에서는 이것을 중시하고 가정에서는 저것을 중시한다는 식으로요. 저는 마음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지구온난화나 핵무장, 사회적 격차와 같은 문제에 직면한 정치인들이 왜 가정의 가치를 끝없이 말하고 있지? 어느 누가 그렇게나 많은 시간과 상당히 많은 액수의 돈을 소비해가며 가정의 가치 캠페인을 벌이려 한단 말인가?’ 그러고 나서 사람들이 [가정으로서의 국가]에 대해 어떻게 은유적으로 말하는지 제가 지도하는 한 학생이 썼던 기말 논문이 떠올랐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보수적인 과세관이 단지 부자들에게 돈을 벌어주는 것과 관련이 있다고 믿습니다. 즉, 부유하여 사회적으로 영향력 있는 계층은 자신의 부를 지키고 싶어 낮은 과세를 선호한다고 생각하죠. 그러나 이는 사실이 아니며, 최소한 이야기의 전부가 아닙니다. 보수주의자들이 부자들에 대해 높은 세금에 반대하는 이유는 세금을 비도덕적 처리의 한 형태로 보기 때문이에요. 세금은 선한 사람들에게 내리는 벌입니다. 이는 부유한 보수주의자들뿐 아니라 가난한 보수주의자들이 보기에도 도덕적으로 타당하지 않죠.

 

 만일 가장 지지하는 이상화된 모형이 엄격한 아버지 도덕성이라면 우리는 정치적으로 더 보수적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만일 자애로운 부모 모형을 지지한다면 우리는 더 진보적일 가능성이 높고요. 진보주의자들의 눈에는 언제나 ‘도덕적으로 그를’ 수 있는 정책이 보수주의자들의 눈에는 아주 도덕적일 수 있죠.

 

 보수주의자들의 눈에는 엄격한 아버지 이상과 일치하는 정책이 아주 도덕적이죠. 진보주의자들은 “당신이 정치에서 하는 행위는 정말로 잘못이다”라고 말할 수 있지만 보수주의자들은 이 말에 바로 “사실은 결코 그렇지 않다. 우리에게 해야 한다고 말하는 당신의 제안이 잘못이다”라고 답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식의 대화는 영원히 계속될 수 있습니다. 불행히도 이것이 정책 입안과 정치적 토의의 실재입니다. 사람들은 보통 객관적인 도덕성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려 해요. 그들은 단지 ‘옳음’과 ‘그름’의 한 유형만 있다고 가정합니다. 미국 정치의 핵심에 두 개의 도덕적인 세계관이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죠. 또한 이 둘 중 어느 한 신념 체계를 지지하는 사람들에게는 각각 자신들이 지지하는 체계가 똑같이 ‘사실’이라는 것도 알지 못합니다.

 

 정치적 중도는 결코 존재하지 않습니다…

 정치적 중도는 은유입니다. 유권자 집단이 극우에서 극좌로 이어지는 일직선상에 있다는 사유에서 우리가 사용하는 심적 개념이죠.

 

 실험 참가자들은 상대 진영의 후보가 모순된 주장을 펼치고 있다는 것을 즉각 알아차렸지만, 자신의 후보 역시 진실을 말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은 의식하지 못했습니다!

 

 미국에는 ‘자유’가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한 완전히 다른 두 해석이 있습니다. 하나는 보수적인 해석이고 다른 하나는 진보적인 해석이죠.

 

 아이디어를 대화 상대자에게 보내려면, 선생님은 그 아이디어에 어울리는 그릇을 찾아야 합니다. 선생님의 아이디어를 운반할 적절한 낱말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죠. 그리고 선생님의 대화 상대자가 그 그릇을 받도록 확실해 해야 합니다. 즉, 그가 선생님이 전하려는 낱말을 듣거나 읽을 수 있도록 확실해 해야 합니다. 이런 식의 많은 일을 해야 하죠.

… 그러나 의사소통이 이처럼 작동한다는 생각은 완전히 엉터리입니다! 아이디어를 물건처럼 옮긴다는 이 단순한 생각은 우리가 서로에게 말을 걸 때 실제로 행하는 것에 적용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게 전달하는 아이디어는 그대로 우리 머릿속에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아이디어는 우리의 사유 활동에서 존재가 사라지지 않습니다. 우리의 머리 밖으로 아이디어를 꺼내 다른 어딘가로 보내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흥미롭게도 부시는 이 맥락에서 ‘공정하고 평등한’이라는 낱말을 사용했습니다. 그가 의미하는 바는 사회가 더 ‘공정하려면’ 도덕적 강인함이 보상을 받고 도덕적 나약함이 벌을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회가 더 ‘평등하려면’ 모든 사람들이 자유롭게 경쟁하며 자신의 개인적인 안녕을 추구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규제나 사회복지와 같은 정부의 개입 없이 ‘자유롭게’ 말입니다. 

 

 만일 선생님이 진보주의자라면 정확히 정반대의 추론이 적용됩니다. 동료 시민들을 ‘궁핍과 공포’로부터 자유롭게 하고 우리 사회를 ‘더 번영하고 공정하고 평등한 ' 사회로 만들려면, 보살핌이 필요한 사람들을 돌보는 일에 도움을 주어 동료 시민들에 대한 책임을 다해야 합니다. 예컨대 사회복지제도와 공공의료, 좋은 공교육이 바로 평등과 번영, 궁핍으로부터의 자유, 공포로부터의 자유를 보장하죠.

 

 언론인들은 ‘테러와의 전쟁(War on Terror)’같은 어구가 본질적으로 사람들을 현혹하고 있다고 소리치는 것 이상의 일을 해야 합니다. 이러한 어구는 범죄 행위를 전쟁 행위의 프레임에 넣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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