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를 생각한다, 임명묵, 사이드웨이, 2021(전자책 발행)
한국은 언제나 서구를 바라보았기 때문에 오히려 자신에 대해서는 별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으며, 반대로 보편적 지식을 제공하는 서구는 한국이라는 특수를 잘 몰랐기 때문에 어떤 언어로 이 사회를 설명해야 할지 감을 잡지 못했다.
사실 방역은 단순히 바이러스의 문제가 아니며, 정확히는 바이러스가 기생하는 인간을 잡아내는 국가의 역량에 관한 문제다.
나는 90년대생이 30대가 되어서도 그들이 다른 세대에 대해 갖는 차이가 유지될 것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트위터는 불행과 분노를 전시하여 인정욕을 얻고, 페이스북과 인스타그램에서는 자신의 일상이나 자랑하고 싶은 모습을 노출해 인정욕을 얻는다는 점에서 큰 구조는 다를 바 없었다.
팬덤 문화는 인간의 원초적인 부족적 열망에 그 기반을 두고 있었고, 현대사회에서는 경험하기 힘들게 된 집단적 소속감을 제공해주었다.
나는 여기서 90년대생이 제기하는 공정을, 어떤 가치나 정당화 기제보다는 정서적 문제로 바라볼 때 많은 현상을 설명할 수 있다고 주장하고자 한다. 요컨대, 공정에 대한 그들의 외침은 그들이 처한 심리적 압박과 가치의 퇴조라는
배경하에서 형성된 정서적 기초가 특정 이슈와 맞물려 터져나오는 현상에 가깝다는 말이다. 그렇기에 90년대생 사이에서 공정은 가치와 논리보다는 느낌, 즉 ‘공정감’의 문제가 된다.
이렇게 본다면 왜 청년정치가 지지부진할 수밖에 없는지 알 수 있다. 물론 아직 20대밖에 안 된 90년대생에게 정치적 활동을 바라는 것 자체가 문제지만, 적어도 정치의 문을 두드리는 20대와 30대 초반이 과거에 비해 눈에 띄게
감소한 것은 분명 사실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정치는 권력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개인의 가치 실현의 문제이기도 한데, 90년대생들과 그 인접 세대는 애초에 가치를 별로 추구하지 않는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확실하게 보장된 지위
상승의 기회이거나 아니면 감각적 즐거움이다.
초국적 시대에 대처할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이 국가밖에 없었다는 것은 근래 부상한 가장 큰 딜레마 중 하나가 되었다.
국가 권력은 억압과 통제를 의미하기도 하지만 안전과 질서를 의미하기도 한다는 것은 이번에도 여실히 증명된 셈이다.
2007년만 해도 한국은 ‘헐리우드를 두드린’ 심형래 감독의 영화 <디 워>를 진중권 교수가 비판한 것을 두고 그에게 집단적 공격을 가하던 나라였다.
무엇보다, 일해보면 바로 알겠지만 보통 외노자들 괴롭히고 못살게 구는 업주들은 한국인 노동자들한테도 그렇게 굴어.
그래서 주 52시간제를 외노자들이 엄청 안 좋아해. 이 사람들이 야근을 너무 하고 싶은데, 야근을 12시간밖에 못 하는 건 얘네 입장에서 정말 끔찍한 일인 거야. 사실 야근에서 빼버리는 건 실제로 우리가 제재 수단으로 쓰는 거기도 해.
알바몬을 켜보면 ‘외국인 가능’이라는 업체들도 있는데, 그런 데는 외노자들도 거르는 곳이라고 보면 돼.
예맨 난민을 둘러싼 논란이나 우리가 언론을 통해 흔히 접할 수 있는 다문화 이야기에는 차별, 배제, 폭력, 혐오 등이 가득하다. 그러나 이것이 정말 서구적 의미에서 인종, 문화 차별과 완벽히 등치될 수 있는지는 조금 더 생각을 해보아야
한다. 나 자신이 이전부터 생각했던 것도 그렇고 L과 Y 두 사람이 말해준 것도 그렇지만, 결국에는 ‘다른 모든 이유를 제쳐두고 외국인이라는 이유로’ 차별하는 사람들은 거의 없다. 따지고 보면 한국인들은 이미 한국인들에게도 그런
식으로 행동하지 않는가?
나는 그래서 이주민 문제를 생각할 대 차별이나 혐오 같은 표현보다 더 현상을 잘 드러내주는 말은 ‘갑질’이라고 생각한다. 갑질은 위계 서열을 파악한 이가 자신보다 낮은 위계에 있다고 판단되는 이에게 얼마든지 위세를 부리고, 인격을
모독하고, 그의 삶에 간섭하려 하는 행위다. 갑질에서 중요한 건 다른 모든 정체성 이전에 부분적으로나마 표준화된 수직적 위계와 서열이 가장 크게 작동한다는 것이다.
한국인의 가장 강한 특성은 그들이 타인에게 늘 갑질을 당하면서도 기회가 보이면 언제든지 갑질을 할 준비가 되어 있는 이들이라는 것일 테다.
차라리 한국의 다문화는 영어에서 말하는 ‘multiculturalism’이 아니라, 고도의 상향의식과 동화주의를 특징으로 하는 독자적인 개념, ‘Damoonhwa’라고 하는 것이 더 적절할지도 모른다. 앞으로도 이러한 한국식 다문화는 수많은
아시아, 아프리카, 동유럽 사람들을 끌어들이며 그들을 한국화시킬 가능성이 크고, 한국화된 이주민들은 인구 감소가 주는 충격의 완충재가 되어주는 동시에 한국을 세계와 더 긴밀히 연결시키는 고리가 될 개연성이 높다.
조국 사태는 여전히 독재와 제국주의에 대한 저항의 뜨거운 심장으로 살아가는 586이 실제로는 자산 증식과 계층 세습에 골몰하는 사람들이었다는 스테레오 타입을 드라마보다 더욱 극적으로 보여준 사건이었다.
나는 이렇게 상위 1% 기득권을 비난하면서도 그들을 동경하고 모방했던, 그러면서도 자신들의 계층 세습에는 어떻게든 도덕적 면죄부를 주려는 상위 10%, 20%의 감수성에 질겁했다. 그들은 대체 자신들을 무엇이라고 생각하는
것일까?
게다가 그들 86세대가 지금 누리고 있는 그 사회적 지배력은 대부분 그들이 직접 쟁취하여 얻어낸 것들이었다. 스스로 무언가를 쟁취해서 얻어냈다는 바로 그 점이 여전히 이어지고 있는 그들의 자신감을 형성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586의 진자 문제는 그들이 이미 사회의 새로운 주류임에도 여전히 주류는 따로 있다고 여기는 그들 고유의 자기규정과 비주류의식에 있다.
정권에 관련 없이 정부는 사회적 여론에 따라 정시와 수시 비율을 마치 목욕물의 냉.온수를 조절하듯이 바꾸어 놓았다.
그러니 교육에 관심 있는 모든 사람이 제각기 답을 보태면서도 해결책은 전혀 나오지 않는 이 피로한 이슈에 대해서 생각조차 포기하는 사람들이 많아진 것은 분명하다. 그래서 학부모와 학생은 어떤 전형이 옳은 것인지를 따지기보다는,
정부가 제도를 손바닥 뒤집듯 뒤집는 것을 상수로 설정하고 그 안에서 최대한 잘 적응하여 입시에서 성공하는 것을 목표로 삼은 지 오래다.
고등교육은 애초에 대중교육을 의도하고 만들어진 것이 아니었다. 고등교육은 국가를 이끌 엘리트를 양성하기 위한 교육이었고, 최초에는 아주 소소의 교육기관만이 고등교육을 제공했다.
노동시장에서 학벌을 대체할 수 있는 더 효율적이고 정확한 신호를 확보하지 못하는 이상, 채용자들은 계속해서 학벌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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