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픈 몸을 살다, 아서 프랭크, 봄날의책, 2017(전자책 발행)

 

 

 아픈 사람을 수용하기 위해 지어놓은 병원과 의료 시설들은 환상을 만들어왔다. 아픈 사람을 건강한 사람에게서 떨어뜨려 가둬놓음으로써 질병 자체도 아픈 사람의 삶 안에 가둬놓을 수 있다는 환상이다. 

 

 

 경험은 살아야 하는 것이지 처리해야 하는 일이 아니다. 몸 또한 처리해야 하는 일이 아니다.

 

 

 의학의 언어로 자신을 표현하면서 아픈 사람은 자기 자신을 잃는다.

 

 

 환자가 되어 질환 이야기를 하는 법을 배운 사람은 자신의 몸을 외부에 존재하는 장소로, 질환이 발생하고 있는 ‘현장’으로 언급한다. 이런 식으로 말하면서 환자는 의사와 자신을 같은 장소에 두지만, 의사에게는 환자의 몸 자체가 외부의 장소다.

 

 

 통증은 몸 자신에게 말하고 있는 몸이지, 외부에 있는 어떤 신이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아니다.

 

 

 중년이라는 시기는 몸과 삶 안으로 서서히 들어오기 때문에 몸 상태가 좋은 날엔 아직 젊다고 자신을 속일 수도 있다.

 

 

 ‘암 환자에게 해주기 적당한 말’ 같은 것은 없다. ‘암 환자’는 포괄적인 실체로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의학이 환자를 분류하는 데 사용하는 일반적인 진단 범주는 질환에 쓰이는 것이지 질병에는 들어맞지 않는다. 이런 범주는 치료에는 유용하지만 돌봄에는 방해가 된다. 

 

 

 아픈 사람은 자기 몸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이해하고자 적극적으로 노력한다. 자기 몸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과 자기 인생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 둘 모두에 잘 대처하려 애쓴다.

 

 

 의료인들은 종종 자신이 환자 개인의 삶에 마음을 쓴다고 믿곤 한다.

 

 

 하지만 아픈 사람도 애쓴다. 아픈 사람은 다른 사람들이 불편하지 않도록 애쓴다.

 

 

 아픈 사람이 두렵고 비통한 마음을 잘 표현해서 칭찬받았다거나, 드러내놓고 슬퍼해서 칭찬받았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다. 오히려 반대다. 웃지 않고 어두운 감정을 드러냈을 때 아픈 사람은 사과해야 할 것처럼 느낀다. 

 

 

 우리는 그저 성격이라고 하지만 그 이면에는 거의 언제나 거래가 이루어지고 있다.

 

 

 암이 아닌 질환을 앓고 있는 사람들은 그냥 아픈 것이지만, 암을 앓고 있는 사람들은 암과 ‘싸운다’.

 

 

 아프기 전에 마라톤을 하면서 몇 번이고 배웠던 교훈은, 먼 거리를 달리려면 힘들여 노력해야 하지만 그렇다고 마라톤이 싸움은 아니라는 것이었다. 싸우면서 뛰기에 42킬로미터는 너무 멀다.

 

 

 삶이 ‘커리어’로 이해될 때 이력서는 몸이 연장된 것이 되고, 이력서상의 빈틈은 조직에서는 낙인과 같다. 사람들 대부분은 직장에 다녀야 하므로, 아픈 사람이 ‘생산성’을 자신의 가치를 재는 척도로 받아들이지 않기란 어렵다.

 

 

 누군가가 우리의 고통을 인정한다는 사실을 알 때 우리는 고통을 보낼 수 있다. 고통을 알아봐주면 고통은 줄어든다. 이 힘은 설명될 수 없지만 인간의 본성 같다.

 

 

 ‘암을 부르는 성격’을 이루는 세부 내용은 각양각색이다. 성관계를 너무 적게 해서이기도 하고, 화를 너무 안 내서이기도 하며, 두려움이 많고 쉽게 좌절해서이기도 하다.

 

 

 암을 부르는 성격이 있다는 이론은 끈질기게 계속될 것이다. 모든 사람에게 그 나름대로 주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아픈 사람은 비난받긴 하지만 한편으론 위로받는다. 성격을 바꾸면 병이 나을지도 몰라. 아직 늦지 않았어. 아픈 사람의 주변인들은, 아픈 사람이 자신과는 달리 그런 성격을 가진 사람이라서 암이 생겼다고 안심할 수 있다.

 

 

 욥이 비난하는 친구들의 주장을 일축하고 난 후 신이 욥에게 답한다. ‘왜 불행이 닥쳤는가’에 대한 답은, 욥에게 물을 권리가 없다는 것이었다.

 

 

 사고나 전쟁에서 죽는 사람을 제외하고 모든 사람에게 병은 언젠가 그냥 생긴다. 이는 사람들이 좋아할 만한 생각은 아니다. 현재 아프지 않은 사람은 ‘이렇게’ 살지 않고 ‘저렇게’ 살면 질환에 걸릴 위험이 줄어든다는 생각을 선호한다. 

 

 

 아픈 아이들은 자기 존재가 뜻하는 바를 사람들이 좋아하지 않는다고 느낄 때 움츠러든다. 부모에게 아픈 아이는 건강한 아이를 갖는 데 실패했다는 사실을 체화한 존재일 수 있다. 그러면 아이는 자신이 실패를 상기시킨다는 데 슬픔과 죄책감을 느끼면서 부모를 대한다.

 

 

 사람들은 소년에게 자신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신호를 보내고, 소년은 그 신호에 따라 행동한다. 이 신호란 바로 소년이 눈에 띄지 않았으면 하는 것이다. 

 

 

 아픈 사람의 책임은 낫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질병을 잘 표현하는 것이다. 이 둘은 서로 전혀 관계가 없다. 나는 자기 질병을 잘 표현하는 이들이 회복 가능성도 더 크다고 믿고 싶지만 그럴 수는 없다. 아마도 언젠가 사람들은 정신이 어떻게 몸에 영향을 미치는지 더 깊이 이해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지금 믿을 수 있는 것은 질병을 잘 표현하는 이들이 질병의 끝에 다다를 때까지 자기 삶을 충만하게 산다는 것뿐이다.

 

 

 우리가 삶 자체를 귀중히 여기지 못한다면 아픈 사람들이 건강할 때 하고 있을 일의 관점에서만 그들을 볼 것이며, 아이들이 어른이 됐을 때 하고 있을 일의 관점에서만 그들을 볼 것이다.

 

 

 아픈 사람들은 이미 아픔으로써 자신의 책임을 다했다. 문제는 나머지 사람들이 질병이 무엇인지 보고 들을 수 있을 만큼 책임감이 있느냐다. 이는 결국 삶이 무엇인지 보고 들을 수 있을 만큼 책임감이 있느냐는 질문이다.

 

 

 아이가 어른이 될 것이며 자신은 아이가 죽는 것을 보지 않아도 될 것이라는 환상, 불변할 것이라는 환상 속으로 뒷걸음치고 싶어 한다. 

 

 

 질병은 움직여가는 몸일 뿐이다.

 

 

 선택이 아무리 제한되어 있다고 해도 우리는 어떻게 오늘 하루를 보낼지 선택할 수 있다.

 

 

 친구는 ‘위기’를 뜻하는 한자가 뭔지 아냐고 묻고는 위험과 기회를 뜻하는 문자가 합쳐져 있는 단어라고 설명해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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