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ewPhilosopher, VOL.16

에너지, 기로에 선 인류

 

 

 생기론을 지지했던 학자들은 대부분, 단지 물질만으로도 적절한 조건 아래 살아 있는 조직처럼 움직일 수 있다는 주장을 의심했다. 방금 사망한 사람의 몸은 죽기 전과 완전히 똑같은 상태로 조합되어 있다. 그런데도 왜 과거에는 할 수 있던 일들을 이제는 하지 못하는 것일까?

 

 

 어쨌든 우리도 모두 질량 에너지를 변환하는 작업을 날마다, 하루 종일 한다. 음식 섭취를 통해 에너지를 얻고 체중을 늘린다. 그 에너지는 자고 걷고 일하고 사랑을 나누는 데 쓰는데, 그러고 나면 몸무게가 준다. 그럼 에너지 계정에 남는 것은…… 우리 자신이다. 즉 우리는 우리가 먹은 것에서 한 일을 뺀 나머지다.

 

 

 앞서 말한 경제 패러다임은 물질의 희소성을 전제로 한다. 즉 물질이 넉넉하지 않기 때문에 인간은 한정된 파이 조각을 차지하기 위해 노동하고, 거래하고, 싸워야 한다는 전제에 따라 모든 중대한 결정이 내려진다. 그런데 물질이 차고 넘치게 되어 모든 재화를 사실상 공짜로 이용할 수 있으면, 공급과 수요의 법칙이 더는 작용하지 않는 경제의 특이점이 찾아올 것이다. 

 우리는 그러한 탈희소성의 시대로 진입할 준비가 아직 되어 있지 않은 듯하다….

 우리는 핵융합의 시대를 맞이할 준비가 되지 않았다. 핵융합의 수수께끼를 풀지 못해서가 아니다. 우리 인간의 마음이 희소성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법을 아직 깨닫지 못했기 때문이다.

 

 

 21세기는 주의 산만의 시대다. 우리는 과도한 정보와 물질을 껴안고 살아간다. 이 과도한 정보와 물질 모두 하루 24시간 내내 우리 주의를 끌려고 경쟁한다. 그 결과로 우리 삶이 풍요로워지기보다는 우리의 가장 귀중한 자원인 뇌가 소모되고 만다. 더 끔찍한 것은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직접 이런 짓을 저지르고 있다는 사실이다.

 

 

 매튜 크로포드가 <당신의 머리 밖 세상>에서 말했듯이, 날마다 끊임없이 쏟아지는 이메일 수백 통에 맞춰 직장 생활을 하는 회사원을 상상해 보라. “우리가 이것을 경험하는 방식은 대개 자기 소유의 위기와 같다. 우리의 주의력은 우리의 것이 아니다. 우리는 집중하려는 대상에 주의를 기울이지 못하고, 이런 상황을 씁쓸하게 불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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