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을 바꾸는 방법: 금지된 약물이 우울증, 중독을 치료할 수 있을까, 마이클 폴란, 소우주, 2021(초판 1쇄)
주디스와 나는 버섯 두세 개를 삼키고서 잠깐 동안 구역질을 참은 후에 네다섯 시간 정도 함께 낯익은 현실의 근사한 이탤릭체 버전 같은 환각을 두어 번 즐긴 경험이 기억에 남는다.
어느 신경과학자가 사이키델릭 체험에 대해 묘사한 표현인 “스노우볼 흔들기”는 나에게 두려움보다는 매혹의 대상으로 느껴지기 시작했다.
내가 여기서 주로 쓸 “사이키델릭psychedelic”이라는 용어는 나름 불리한 면을 갖고 있다. 1960년대에 도입된 이 이름에는 반문화의 앙금이 많이 남아 있다. 이런 관련성에서 벗어나고 이 약물들의 영적 영향을 강조하기 위해서 어떤 연구자들은 “엔테오젠Entheogen”이라고 부르자고 제안했다. 이것은 그리스어로 “내면의 신성”이라는 뜻이다. 이 단어는 나에게 너무 강하게 느껴졌다. 1960년대의 과시적인 특징에도 불구하고 1956년에 만들어진 “사이키델릭”이라는 단어는 어원상 정확하다. 그리스어에서 따온 이 단어는 “정신의 현현mind nanifesting”이라는 뜻이고, 이것이 바로 이 놀라운 분자들이 할 수 있는 일이다.
우리는 사이키델릭으로 인한 체험이 사람의 기대감에 강렬하게 영향을 받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보다 더 크게 영향을 받는 다른 계열의 약은 없다.
“저는 과거에 나와 인연을 맺었던 모든 사람들이 고드름이 되어 매달려 있는 커다란 동굴에 있었어요. 제가 2학년 때 옆에 앉았던 사람, 고등학교 친구들, 제 첫 번째 여자 친구, 모두가 거기에서 얼음에 둘러싸인 채 매달려 있었죠. 아주 멋졌어요. 전 그들 한 명 한 명을 떠올리며 우리 관계의 모든 것을 기억해냈죠. 그건 제 인생의 궤적에 관한 검토 같은 거였어요. 이 모든 사람들이 지금의 저를 만들었죠.”
많은 과학자들, 또는 많은 영적 수행자들과 비교할 때, 롤랜드 그리피스는 키츠가 셰익스피어를 묘사하며 사용했던 “소극적 수용능력negative capability”을 상당 부분 지니고 있다. 이것은 과학으로든 영성으로든 절대적인 것을 추구하지 않으면서 불확실함, 미스터리, 의문 속에서 존재하는 능력이다. “내가 유물론적 세계관을 100퍼센트 확신한다고 말하는 건 내가 성경을 문자 그대로 100퍼센트 확신한다고 말하는 것만큼 말이 안 되는 일이에요.”
실로시빈 버섯은 남부 멕시코에서 발견되었는데, 마자텍 인디언들은 스페인 정복 이전부터 치료 목적과 점을 칠 용도로 은밀하게 “신들의 살”을 사용했다.
균류는 지구상에서 가장 이해받지 못하고 인정받지 못하는 생명체 왕국이다. 이들은 지구의 건강에 없어서는 안 됨에도 불구하고(유기물의 재활용 전문가이자 토양 생산자로서) 인간에게 무시당할 뿐만 아니라 스테이메츠가 일종의 “생물학적 종차별”이라고 칭한 버섯공포증mycophobia이라는 뿌리깊은 악감정의 희생양이다.
오스먼드의 신조어는 “정신psyche”의 “현현delein”을 뜻하는 두 개의 그리스 단어의 결합이었다. 오늘날 그 단어는 1960년대의 네온 컬러를 뒤집어 쓰고 있지만, 당시 그가 ‘사이키델릭’이라는 단어를 추천한 것은 그 단어가 지닌 중립성 때문이었다. 이 단어는 “광기나 열광, 흥분 같은 특정한 함축적 의미를 지니지 않으멶서도 정신의 확대와 확장을 암시한다.” 또한 “다른 연상으로 오염되지 않았다”는 장점을 갖고 있었다. 이것은 오래 가지 않았지만 말이다.
엔지니어들은 종교를 갖게 되었다(그리고 여전히 그렇다. 나는 경영 훈련에서 사이키델릭을 사용하는 오늘날의 베이 지역 테크 기업 한 곳을 안다. 다른 여러 기업도 “미량투여의 금요일microdosing Fridays”을 도입했다).
권력을 가진 누군가가 무심코 진실을 말하는 것을 정치적 스캔들이라고 부른다는 말이 있다.
양안 깊이 역전 착시binocular depth inversion illusion라는 심리학 테스트이다. 가면이 돌아가는 동안 그 볼록한 부분이 오목한 안쪽으로 바뀌면서 굉장한 일이 일어난다. 움푹한 가면이 튀어나와 다시 볼록해지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이것은 정신이 쓰는 속임수로, 모든 얼굴은 볼록하기 때문에 오류로 보이는 것을 자동으로 고치는 행위이다. 다만, 신경과학자 한 명이 나한테 말한 바에 따르면, 사이키델릭의 영향하에서는 고쳐지지 않는다고 한다.
이런 소위 베이즈 추론Bayesian inference(이 정신적 추측의 바탕이 된 확률론을 발전시킨 18세기 영국 철학자 토마스 베이즈의 이름을 땄다)은 노력과 에너지를 절약하고 지각하는 속도를 높여주어 대체로는 우리에게 유용하다. 하지만 돌아가는 가면의 경우에는 문자 그대로 우리를 현실에 대해 잘못 형성된 기존의 이미지에 갇히게 만든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베이즈 추론을 깰 수 있다는 게 밝혀졌다. 조현병 환자들과, 일부 신경과학자들에 따르면 고용량의 사이키델릭을 섭취한 사람들은 이런 예측된, 또는 관습화된 방식으로 사물을 보지 않는다.
“듣는다”는 말은 네 줄의 첼로 현이 만드는 움직임으로 인한 공기의 진동과 나 사이에 오간 것을 묘사하기에는 한참 부족하다. 한 곡의 음악이 지금처럼 나를 깊숙하게 꿰뚫었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이것을 “음악”이라고 부르는 것조차 지금 흐르기 시작하는 것을 폄하하는 것 같았다.
내가 인터뷰했던 많은 자원자들이 두려움과 불안을, 흡연자들의 경우 중독을 극복할 수 있었던 것 같다. 맹렬한 반사 반응과 자기 자신의 이익이라는 궁색한 개념을 가진 자아의 폭압에서 잠시나마 해방되어, 키츠Keats의 “소극적 수용력negative capability”, 즉 의심스럽거나 불명확한 상황에서 반사적으로 해답을 찾으려 하지 않고 그대로 머무는 능력의 극단을 경험하게 된다…… 명상도 그렇게 하는 방법 중 하나라고 그녀는 말했다.
카하트-해리스는 엔트로피 논문에서 뇌의 일시적인 재편이라 하더라도 정신적 경직성이 특징인 장애로 고통받는 사람들에게는 큰 도움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고용량 사이키델릭 체험은 “스노우볼을 흔드는” 힘이 있다고 그는 말한다. 스노우볼 안의 눈이 천천히 다시 내려앉을 동안 사고의 불건전한 패턴을 부수고 건강에 더 좋은 패턴과 서사가 합병될 수 있는 유연한 공간(엔트로피)을 형성할 수 있다는 말이다.
예를 들어 내가 특히 관대하거나 감사하는 마음을 느끼고 감정과 사람들과 자연에 열린 기분이라면, 나는 확장감을 느끼는 것이다. 이러한 감정은 종종 자아가 작아지고, 자아의 영역인(그리고 의존하는) 과거와 미래에 대해 집중력이 줄어드는 느낌을 동반한다. 같은 이유로 무언가에 집착하거나 두려움, 방어감, 초조함, 걱정, 후회를 느낄 때면, 나는 현저한 수축 상태이다(걱정과 후회는 시간 여행을 하지 않으면 존재하지 않는다). 이런 때에 나는 훨씬 나 같은 기분이지만, 별로 좋은 쪽으로 그런 건 아니다.
AI설계자들은 컴퓨터에게 학습 방법과 문제 해결 방식을 가르칠 때 질문에 대한 답을 “고온high temperature” 검색과 “저온low temperature” 검색으로 찾도록 한다. 저온 검색(에너지가 더 적게 들기 때문에 이렇게 부른다)은 가장 가능성이 높거나 찾기 쉬운 답을 고르는 것이다. 과거의 비슷한 문제에 통했던 답처럼 말이다. 저온 검색은 꽤 자주 성공한다. 반면 고온 검색은 가능성이 낮지만 더욱 기발하고 창의적인 답을 찾는 것이기 때문에 더 많은 에너지가 든다. 선입견의 틀 바깥에서 답을 찾는 것이다. 풍부한 경험에 의지하는 성인의 정신은 대부분 저온 검색을 한다.
우리가 죽음에 대해 두려움 감정을 갖는 것은 자아의 작용인데, 자아는 우리가 죽음에 가까워질수록 감당하기 힘든 고립감을 느끼게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자아가 존재하지 않는 세상에 태어난다. 하지만 우리 자신의 내부에 갇힌 채로 살다가 죽는다.” 코헨은 이렇게 썼다.
의미에 관한 질문은 NYU 치료사들이 접근하는 방법의 중추이고,* 실로시빈을 한 암 환자들의 경험을 이해하는 데 특히 도움이 될 수 있다. 이 환자들 다수에게 말기 암 진단은 무엇보다도 의미의 위기로 여겨진다. 왜 나지? 왜 내가 이런 운명에 놓인 거지? 이것이 삶과 우주에 어떤 의미가 있나? 이런 실존적 위기의 무게 아래에서는, 정신이 내부로 향하고 세상을 차단하면서 사람의 시야가 좁아지고, 감정 목록이 축소되며, 관심 범위가 줄어든다. 신중한 검토와 걱정의 순환 고리가 사람의 정신적 시간과 공간을 더 많이 차지하게 되면서, 생각의 습관을 강화하고 여기에서 벗어나는 것을 더욱 어렵게 만드는 것이다.
*아우슈비츠와 다카우에서 살아남은 프랑클은, 인간의 핵심적 원동력이 그의 스승 프로이트가 주장한 것처럼 쾌락도 아니고, 알프레드 아들러가 주장한 것처럼 힘도 아니며, 의미라고 믿는다. 프랑클은 “삶의 이유를 아는 사람은 거의 모든 방식의 삶을 견딜 수 있다”고 쓴 니체에게 동의한다.
임페리얼 칼리지 팀이 디폴트 모드 네트워크가 해체되면(자신이라는 감각도 사라진다) 뇌의 전반적인 연결이 늘어나 평소에는 소통하지 못하던 뇌 영역들이 새로운 연결선을 만든다는 사실을 발견한 것을 떠올려보라.
존슨은 중독자들에게 실로시빈의 가치란, 그 사람의 삶과 습관에 관해 명확하고도 심오한 새 관점을 제시해주는 데 있다고 믿는다. “중독은 우리가 사로잡혀 꼼짝 못하는 이야기이자 우리가 빠져나오려다가 실패할 때마다 강해지는 이야기죠. ‘난 흡연자이고 그만둘 힘이 없어’라고 할 때마다요. 이 여행은 그들에게 거리를 약간 둔 상태에서 더 큰 그림을 볼 수 있게 해줘요. 흡연이라는 단기적인 쾌락이 삶이라는 더 크고 장기적인 상황에서 어떤지를 보게 해 주는 거예요.”
그가 보기에 그런 모델 중 가장 중요한 것은 고용량 사이키델릭 경험이 일시적으로 용해시키는 자신, 즉 자아이다. 그는 “우리의 중독이란 자신을 중심에 놓은 사고 패턴이다”라고 말한다.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은 현대 인간이 느끼는 분리감을 “일종의 의식의 광학적 착각”* 이라고 불렀다.
*”인간은 우리들이 ‘우주’라고 부르는 것의 일부, 시공간적으로 한정된 일부이다. 인간은 자기 자신과 자신의 생각, 감정을 나머지와 분리된 것으로 경험한다. 이것이 일종의 의식의 광학적 착각이다. 이 착각은 우리에게 일종의 감옥으로, 우리를 우리 개인의 욕망과 우리에게 가까운 몇 사람에 대한 애정에 한정한다. 우리의 임무는 우리의 연민의 둘레를 넓혀서, 모든 살아 있는 생명체와 아름다운 장녀 전체를 아우르기 위해 우리 자신을 이 감옥에서 해방하는 것이어야 한다.”
“알코올 중독은 영성 장애로 이해할 수 있어요.” NYU의 치료실에서 처음 만났을 때 로스가 나에게 말했다. “시간이 흐르며 당신은 이 물질을 제외한 모든 것과의 유대감을 잃게 돼요. 삶이 모든 의미를 잃죠. 나중에는 당신의 아내, 아이들보다도 술이 더 중요하게 되죠. 결국 그걸 위해서 희생하지 못할 것이 없게 되고요.”
“세상을 감옥으로 보는가, 놀이터로 보는가?”는 매트 존슨이 행복한 쥐 실험에서 뽑아낸 핵심 질문이다.
“중독된 사람들은 자신이 스스로의 건강, 직업, 사회적 행복에 해를 입히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자신의 행동이 다른 사람에게 가하는 해에 대해서는 보지 못하곤 해요.” 무엇보다도 중독은 과격한 형태의 이기주의다. 중독자를 치료할 때 가장 힘든 일 중 하나는 자신의 정체성을 규정하고 하루 일과를 구성하게 된 행동인 중독이 가지는 강렬한 이기심을 넘어서서 시야를 넓히는 일이다. 헨드릭스는 경외가 그럴 힘을 갖고 있다고 믿는다.
그는 불안증 전문가가 이 두 장애를 “이란성 쌍둥이”로 봐야 한다고 말한 것을 인용했다. “우울은 과거의 상실에 대한 반응이고, 불안은 미래의 상실에 대한 반응이다.” 둘 다 끊임없는 생각에 사로잡힌 정신을 나타낸다. 하나는 과거에 대한 집착, 하나는 미래에 대한 근심에서 생긴다. 두 장애를 구분하는 주된 특징은 시제이다.
데이비드 포스터 윌리스David Foster Wallace는 자살하기 3년 전에 했던 대학 졸업 축사에서 청중에게 “' 정신은 아주 훌륭한 하인이지만 끔찍한 주인이기도 하다’라는 오래된 금언을 생각해 봅시다. 이건 다른 많은 금언처럼 겉보기에는 별 거 아니고 따분하지만, 실제로는 훌륭하면서도 끔찍한 진실을 담고 있죠. 총기로 자살한 사람들이 전부 머리를 쏜 것은 절대로 우연이 아니에요. 그들은 끔찍한 주인을 쏘아버린 겁니다” 라고 말했다.
“영적”이라는 단어의 일반적인 반대말은 “물질적”이다. 적어도 나는 이 탐구를 시작할 때 그렇게 믿었다. 나는 영성과 관련된 모든 문제가 형이상학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는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은 “영적”이라는 단어에 대한 훨씬 적합한 반대말, 그리고 분명 더욱 유용한 반대말은 “자기중심적”이라고 생각한다.
지성을 현실이 생명체에게 던지는 새로운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이라고 정의한다면, 식물은 분명히 그걸 갖고 있다.
사이키델릭이 주는 선물 중 하나는 우리 현대인들이 당연한 것처럼 받아들이는 주체성에 대한 인간의 독점을 깨뜨리는 과정에서 세상을 되살린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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