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예보: 핵개인의 시대, 송길영, 교보문고, 2023(초판 2쇄)
‘너는 그냥 S대니? 나는 S대에 P고등학교야.’ 이렇게 과잠에 출신 고등학교까지 적으면서 단계를 높이면 2관왕이 됩니다. 여기에 ‘메디컬 스쿨’까지 써 있으면 3관왕입니다. 이렇게 은연중에 계층화에 익숙해지고 특권 의식까지 갖게 된다면 세상 구석구석을 채운 다른 가치들을 발견할 기회를 놓치게 되지 않을까요? ‘나는 노력했으니까 드러낼 수 있다’라는 인식이 바로 메리토크라시meritocracy의 함정입니다. 능력주의, 다시 말해 나는 스스로 노력해서 획득한 능력을 갖고 있다는 인식입니다.
한편에서는 혹독한 식민지 경험과 전쟁을 치르고 잿더미에서 시작한 한국의 국가주의는 좀 달리 봐야 한다는 의견도 있습니다. 한국은 전쟁터였기에 그다음의 삶도 혹독한 경쟁으로 생존해 온 것이라는 설명입니다. 경쟁과 전쟁에 최적화되어 불평을 쏟아놓으면서도 국가의 규칙에 저항 없이 잘 따른다고 보는 것입니다.
다른 이에게 무엇인가 이로운 것을 주는 행위를 사회적 성취라 정의한다면, 배우는 이유는 깨치고 얻은 지혜를 모두에게 돌려주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학력은 사회적 성취의 단계에서 필요한 준비일 뿐, 그 자체가 성취라 보긴 어렵습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L부장은 지금껏 자신의 욕망을 마음 놓고 표출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나는 지금까지 20년 간 내 욕망을 드러내지 못했는데, 어떻게 새로 들어온 친구가 그걸 얘기할 수 있지?’ 그는 상급자의 취향에 맞추는 것을 직장인의 도리라고 여겨왔기에 젊은 사람이 주저 없이 자신의 욕망을 표출하는 풍경이 낯선 것입니다.
언어 표현은 현행화를 게을리하면 다음 세대의 혐오를 받습니다. 대상을 타자화시키지 않도록 계속 사유해야 합니다. ‘유니섹스unisex’라는 말은 ‘젠더리스genderless’라는 표현으로 진화합니다. 유니섹스는 ‘내가 옷을 만들었는데 남성도 여성도 입을 수 있다’라는 것입니다. 이에 반해 젠더리스는 ‘성 구분 자체를 하지 말자’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파는 것의 본질이 시간이 아닌 다른 무엇으로 대체되었다면, 시간이 아니라 지능을 판다면 개인은 언제 어디에 있어도 무방합니다. 더 이상 시간과 장소가 중요한 변수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시간은 누가 팔고 있을까요? 바로 로봇입니다.
팀장님에게 야근이 가능한 코파일럿은 6시 이후 유일한 동료입니다. 문제는 팀장님이 코파일럿과의 협력에 익숙해지면 다른 매니저들의 업무가 하나둘씩 줄어들고 결국 혼자 일하는 구조로 정착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코파일럿은 승진을 요구하지도 않고 급여 인상이나 보너스를 요구하지도 않습니다. 회식도 점심 시간도 필요 없고 노조에 가입하지도 않습니다.
지속적인 인플레이션으로 인한 급여 현실화 등 인간 노동자가 처우 개선을 요구할수록 자동화의 속도는 빨라집니다. 그리고 그 자동화는 결국 각자 혼자서 엄청난 일을 하는 사람, 다시 말해 ‘AI디렉터’로서 인간의 진화를 추동합니다.
“나는 주소를 말할 때 긴장해.”
전화를 부담스러워하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전화로 주문할 때마다 ‘메모장에다 주소와 메뉴를 쓰고 읽는다’라고 고백했습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앱이 좋은 게 아니라 전화가 싫다는 이야기였습니다.
글로벌 밈의 ‘콜 포비아(전화 공포증)’를 보면 달리기할 때의 심장 박동보다 전화벨이 울릴 때의 심장 박동이 더 빨라진다는 유머가 있습니다.
모 지방자치단체에서는 노년 인구를 위해 ‘키오스크 연습’ 모바일 앱을 개발해서 배포했습니다. 패스트푸드점 키오스크를 브랜드별로 거의 그대로 모사해서 장바구니에 담고 옵션을 선택하고 결제하는 연습까지 해보는 콘텐츠입니다. 매장에 가면 뒤에서 기다리는 사람 때문에 긴장할 수 있으니 미리 세세한 트레이닝으로 돕는 것입니다.
이제까지 보살핌 노동은 온기를 지닌 인간의 고유 영역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치매 노인을 돌보는 데는 오히려 감정이 없는 로봇이 더 유리하다는 사실이 현장에서 밝혀지기도 합니다. 이상 행동을 반복하는 치매 노인 앞에서 화를 참지 못하는 인간보다 감정이 제거된 로봇이 섬세한 케어를 지속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한편으로는 이렇게 돌봄 로봇, 서빙 로봇이 보편되되면 이제 ‘인간 서비스’가 다시 프리미엄 시장이 될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로봇의 핵심은 물리적, 정서적 행위의 자동화입니다. AI의 핵심은 지능적, 창조적 활동의 자동화입니다. 결국 인간은 창조적 활동, 지능적 활동, 육체적 활동, 정서적 활동 그 모든 영역에서 로봇, AI와 함께하게 될 운명입니다.
이미 캐나다 가수 그라임스는 “내 목소리를 사용해 AI가 생성한 성공적인 노래에 대해 50% 로열티를 분할하겠다”라고 했습니다. 저작권의 수혜자가 생존해 있으면 그 분배가 크게 복잡할 게 없습니다.
2023년 골드만삭스의 보고서에 의하면 자동화로 인해 전 세계 3억 개 정도의 일자리가 위협받지만, 동시에 매년 7%의 GDP가 상승한다고 합니다.
이러한 추세로 보면 ‘중앙에서 관리할 수 있다’라는 생각은 더 급속히 낡은 패러다임이 될 것입니다. 이전 방식으로 중앙화된 조직에서 기존의 규칙을 고집하면 미래에 대한 예측과 반응 속도가 느려질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 세상이 바뀌는 속도를 보면 환경 변화를 인지하고, 해결책을 내고, 적응하는 3단계가 거의 동시에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앞으로 일을 잘하는 사람은 일을 열심히 하거나 숙련하는 사람이 아니라, 일을 없애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문제는 그의 직업이 일을 없애는 것이라면, 그 사람 본인은 그 다음에 무엇을 할 것이냐는 모순이 남아있다는 것입니다.
‘자식의 인생에 어느 정도로 관여해야 하나’는 모든 부모의 고민입니다. 인생을 먼저 산 선배로서, 나아가 앞으로 자식의 소득구조에 지분을 갖는 일종의 투자자로서 중요한 결정이기도 합니다.
기업은 앞으로 더 노골적으로 ‘가능성 있는 신입’이 아닌 ‘처음부터 완성된 숙련자’를 모시게 될 것입니다. 신입사원이라는 용어 자체가 사라질 날도 머지않았습니다.
영미권에서는 이미 영입 업무를 담당하는 팀의 명칭이 ‘탤런트 애퀴지션talent acquisition(인재 확보)’으로 변모하고 있었습니다. 언어가 바뀌는 것은 실제로 문화와 규칙이 바뀌고 있다는 것입니다.
유럽의 럭셔리 브랜드는 마진의 한계를 생각하지 않습니다.
각자의 업의 선택은 가치관에 따른 열망의 결과임에도 인간인지라 수평 비교의 오류를 피할 수 없습니다. 강아지와 고양이를 비교하는 우를 범하는 것입니다.
아버지와 어머니 양가 각각 할머니, 할아버지까지 생존하시면 한 명의 젊은이가 6명의 노인을 돌봐야 하는 일도 생깁니다. 20년 양육의 되갚음이 산술적으로는 누계 100년 이상의 돌봄으로 길어질 터이니 효도란 다음 세대에게는 불공정한 거래로 다가올 수밖에 없습니다.
사회적 매너는 수시로 업데이트되기에 주변 사람들에게 계속 물어보고 배우는 게 맞습니다.
‘멋지게 나이 든다’라는 이야기는 좀 다르게 해석되어야 할 것 같습니다. ‘멋지게 나이드는 것’이 아니라 애초에 ‘멋진 사람이 나이가 든 것’입니다.
지금의 ‘나’는 늙었기 때문에 무언가 해내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젊을 때부터 시도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결혼은 가장 많은 비용이 드는 행사이고, 짧은 시간에 그 가족의 경제 사회 문화적 포트폴리오가 압축적으로 공개되는 순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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