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프 브로크, 진저 개프니, 복복서가, 2021(초판 발행)
말은 주인을 닮는다고들 한다.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마주가 되어가는 것이다. 말들은 주인의 내면에 자신을 녹아들게 한다. 감정의 위장이다.
움직임 또는 움직임의 부재는 그 자체로 감정이 담긴 이야기다.
“자기가 위인지 아래인지 모르겠다면 아래인 거야.”
상대방 손을 잡고 꽉 쥘 때마다 피부의 질감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그러쥔 손의 단단함이 그 자체로 감정을, 나름의 언어를 전달한다. 처음에는 마주잡은 손이 망치를 잡은 양 거칠게 느껴진다. 하지만 곧 살갗에 맞닿은 살갗으로 물렁해지고, 우리는 자주 써서 적당히 길든 장갑처럼 서로 딱 들어맞는다. 내가 미소 지을 때마다 그들의 눈가에도 반달 모양의 주름이 잡힌다.
우리 모두에게는 지나온 배경이 있지만, 그렇다고 우리가 어딘가에 속해 있는 건 아니다. 새라의 모친은 새라를 목 졸라 죽이려고 했다가 이 주 뒤 본인이 자살했다. 지금 새라는 통통하고 짧은 두 팔을 에스트렐라의 검은색과 흰색 얼룩무늬 목에 두르고, 머리는 녀석의 이마에 대고 서 있다.
우리가 이 오두막에 들어와 같이 살기 시작했을 때, 나는 우리가 새집에 대해 내리는 결정에 사사건건 딴지를 걸었다. 냉장고를 구입하고, 세탁기와 건조기를 사고 – 이런 것들이 전부 나를 조여오는 족쇄처럼 느껴졌다. 내가 자유로워지려고 싸우는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실제로는 나에게 익숙한 한 장소를 향해 다시 도망쳐가고 있었다. 그곳은 바로 어린 시절의 외로움이었다.
살아있지만 죽은 상태, 속으로 이런 생각을 하다가 내가 왜 초조한지 퍼뜩 깨닫는다. 저들의 부서진 부분들이 꼭 나를 닮아서다. 나도 오래도록 내 안의 나침반을 잃은 채 살아왔다. 건강하고 좋은 것을 알아보는 스위치가 꺼져버렸다. 누군가가 아무리 크고 시끄러운 몸짓으로 다가와도 나를 깨우지 못했다.
온 가족이 4대째 감옥을 들락거린 가정에서 자란 폴은 미묘한 신호를 포착하는 데 익숙지 않다.
나에게 이렇게까지 숨김없고 솔직하게 사과한 사람은 여태 없었다. 내가 기억하는 한 자신이 저지른 못된 짓에 전적으로 책임을 시인한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그리고 내 기억엔 내가 그런 적도 없다.
나는 터지기 일보직전의 물집 같은 기분이다.
나도 내가 절대로 벗어날 수 없는 곳, 이를테면 내 말들이 사는 이런 축사 같은 곳으로 들어가는 상상을 해본다. 그렇게 된다면 나는 그 공간에 속속들이 익숙해질 것이다. 내가 싼 오줌 냄새를 재차 맡을 테고 무슨 의미든 찾아내려고 내 배설물을 짓이길 것이다.
내 뒤에 선 남자는 자기가 산 아이스크림 케이크가 녹을까봐 노심초사한다. 생일 파티에 가는 길이란다. 그러자 다들 녹지 않은 아이스크림 케이크를 파티에 무사히 가지고 가라며 그에게 차례를 양보해준다.
조이가 열두 살 때 부모가 조이와 동생들을 전부 버렸다고 한다. 그래서 조이에게는 역할모델이 없었다. 세상에 어떤 규칙들이 존재하는지, 그것을 어떻게 지키며 살아갈지 본보기가 되어줄 사람이 없었다.
우리가 잘 대해줄 것을 어떻게 아는 걸까. 참을성 있게 대할 것을 어떻게 아는 걸까. 그렇게 따지면 우리가 서로에 대해 이런 것들을 어떻게 아는지도 참 모를 일이다.
“고마워, 친구.” 나는 무의 목 너머로 몸을 쭉 뻗어 샘을 꼭 껴안는다. 샘에게서 한동안 안 씻은 사람의 체취가 난다. “이 광활한 하늘 아래 네가 여기서 식물을 키우면서 하고 싶은 대로 살고 있다는 걸 떠올리면 마음이 푸근해져.”
말을 타는 건 파도를 타는 것과 비슷하다고 늘 생각해왔다. 파도는 우리를 감으면서 지나간다. 우리는 파도를 발로 차거나 때리지 않고, 파도를 컨트롤하는 건 꿈도 꾸지 않는다. 모든 파도는 특색이 있다. 어떤 파도는 순식간에 높은 벽을 만들었다가 금방 꺼진다. 어떤 파도는 얇게 밀려와 천천히 일어선다. 그런 파도는 표면에 부서진 자국 하나 없이 매끄러운 터널을 만드다. 파도가 다가오는 게 보이면 서프보드를 비스듬히 놓는다. 그리고 손으로 물 저을 준비를 한다. 그러나 일단 파도가 감아오기 시작해 우리를 덥석 물면, 그다음엔 마치 연인에게 하듯 그저 표면을 부드럽게 미끄러지는 수밖에 없다.
땅에 닿아야만 벨의 몸이 하는 이야기가 들렸다. 녀석이 만들어내는 모든 움직임이 하나의 긴 문단, 한 편의 이야기, 서로를 이해하는 하나의 방편임이 내게도 비로소 보이기 시작했다. 나는 눈으로 듣는 법을 배웠다.
초등학교 1학년 때와 2학년 때 나는 엘름 가와 뉴로드가 만나는 모퉁이에서 내가 다니던 가톨릭 스쿨의 스쿨버스를 기다리곤 했다. 일찌감치 버스 정류장에 나가 이웃집 하얀 울타리에 걸터앉아 소리의 부재에 귀기울였다.
침묵은 곧 눈꺼풀 안쪽에 보이는 하얀색이고 누가 일어나 만지기 전의 아침 공기 냄새였다.
부서지는 파도를 앞질러 날아가는 바닷가의 새들. 돌방파제 안쪽에서 물에 쓸려 들어왔다 나갔다 하는 불가사리들. 온종일 등딱지 안에 머무는 거북이들. 아무것도 아닌 것이 곧 특별한 것임을 알았지만, 그것이 정확히 뭔지는 알 수 없었다. 평생 그것을 찾아 헤맸는데, 그러다가 벨을 만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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