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한 정상가족, 김희경, 동아시아, 2023(개정증보판 5쇄)
“한 사회가 아이들을 다루는 방식보다 더 그 사회의 영혼을 정확하게 드러내 보여주는 것은 없다.” - 넬슨 만델라Nelson Mandela
아동학대의 80% 이상은 집에서 일어났다. 한편, 같은 기간 사교육비 지출은 역대 최고를 찍었다. 한국 남성이 집에서 자녀와 함께 보낸 시간은 하루 평균 6분에 불과했다. 육아휴직을 한 여성 중 43%는 복직 1년 안에 사표를 냈다.
표면상의 다양성을 넘어서, 체벌은 언제나 단 하나의 메시지를 반복적으로 전달한다. 바로 체벌이 언제라도 반복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너의 몸은 온전히 너의 것이 아니며, 나는 언제든 너에게 손댈 수 있다는 가르침이다. 체벌에 동의한다는 것은 이 가르침을 수용한다는 뜻이다.
매를 들고 무섭고 엄하게 다스려야 아이들이 문제행동을 보이지 않고 잘 자란다는 통념을 뒷받침하는 과학적 근거는 없다. 무수한 실증적 데이터는 오히려 그 반대를 가리킨다. 체벌의 긍정적 효과는 그저 믿음뿐이고, 체벌의 부정적 효과를 보여주는 연구들은 워낙 많아서 이건 논쟁이라고 할 수도 없다.
내가 체벌이 문제라고 생각하는 더 큰 이유는 아이들에게 폭력도 사랑이라고 가르치며 가해자의 논리는 내면화하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 그 결과 1시간씩 자유롭게 노는 시간을 가졌던 실험집단 아이들의 학습태도가 좋아졌고 주의 집중이나 불안 등 심리적 문제들이 개선됐다.
한국 사회에서 부모가 자신의 뜻대로 자식을 ‘처분’하는 가장 극단적인 행위가 지금도 간간이 발생하는 부모의 자녀 살해 후 자살이다. 언론은 이를 곧잘 ‘가족 동반자살’이라 부른다. 행위 자체에도 그렇고 이를 ‘동반자살’이라고 부르는 표현 둘 다에 아이들을 부모와 분리된 존재로 바라보지 못하고 부모가 세상을 버릴 때 데리고 갈 정도로 처분이 가능한 소유물처럼 여기는 관점이 배어 있다.
사람이 다른 사람의 죽음을 ‘동반’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부모가 자녀를 숨지게 한 뒤 자살한 사건들을 어떻게 계속 ‘동반’이라고 부를 수 있느냐는 의견이었다.
놀랍게도 기성세대들이 곧잘 좋았다고 추억하는 ‘박정희 시대’가 사실은 오늘날과 크게 다르지 않을 정도로 자살률이 높은 시대였다. 박정희 집권 초기인 1965년의 자살률은 29.81명(이하 10만 명당), 10년 뒤인 1975년에는 31.87명으로 정점을 찍었다. 1960~70년대의 자살률은 거의 내내 인구 10만 명당 25명 이상의 높은 수치였다고 한다. 이는 한국이 OECD 국가 자살률 1위인 오늘날의 통계(2015년 25.8명)와 거의 비슷한 수준이다.
대구, 서울 양천 등 입양아동 학대사망 사건들에서 드러난 공통점 중 하나는 경찰이나 아동보호전문기관 상담원들이 ‘입양까지 한 훌륭한 사람들이 아이를 학대할 리 없다’라는 강력한 선입견 때문에 제대로 된 대응을 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생후 30개월 때 입양된 C씨는 “눈을 맞추고 안으면 생모도 아이도 힘들어진다고 말하는 입양기관 관계자나, 그 말만 듣고 눈을 돌린 생모나, 아이가 빨리 오기만 하면 모든 상처가 지워질 거라고 믿는 입양부모나 모두 이리저리 옮겨질 아이에 대한 예의를 갖추고 있는지 묻고 싶다”라고 말했다.
한국 사회에서는 개인이 아니라 가족이 경쟁단위다.
자신 안에 내면화한 부모의 모습과 싸우고, 달래고, 도망치고, 협상하고, 이해하는 과정이 곧 자기 자신이 되어가는 성장의 과정이다. 나이가 든다고 끝나는 일도 아니고 어쩌면 평생 지속해야 하는 과제다.
스웨덴 역사학자 라르스 트레고르드Lars Traggardh가 발표한 ‘스웨덴식 사랑 이론Swedish theory of love’이 그런 논리다.
이 이론은 진정한 인간관계는 서로에게 의존하지 않고 불평등한 권력관계에 놓이지 않는 개인들 사이에서만 가능하다고 말한다.
어떤 학자들은 이 같은 스웨덴의 국가주의적 개인주의를 ‘차가운 신뢰cool trust’라고 불렀다. 친밀한 관계의 복종, 희생과 상호의존에 의해 형성되는 ‘뜨거운 신뢰hot trust’에 대비하여 개인의 자율성과 평등에 대한 남다른 강조와 공존하는 높은 사회적 신뢰를 일컫는 말이다.
서구에서 유년기가 인생의 독립적 시기로 인정받기 시작한 것은 근대 시민사회가 형성되고 발전하던 때부터였다. 그러나 근대화 과정 자체가 뒤틀린 우리 사회에서 아이는 그저 ‘미래의 희망’일 뿐이다. 아이의 ‘현재의 행복’에는 별 관심이 없고 유년기 자체를 하나의 독립적인 인생의 단계, 시기로 간주하지 않는다.
최근 트위터에서 한 트위터리안의 촌철살인을 보았는데, “한국 사회가 아이를 바라보는 관점은 ‘경력 같은 신입’이기를 바라는 관점”이라는 것이다.
리베카 솔닛Rebecca Solnit은 공감empathy에 대한 아름다운 에세이 <멀고도 가까운>에서 사람은 타인에게 공감함으로써 자아는 확대되지만 그다음엔 자아도 위험과 고통을 분담하게 된다고 썼다.
하지만 공감을 실천하는 모습은 좀처럼 보기 어렵다. 왜냐하면 그것이 정말로 어렵기 때문이다.
우선 공감은 편협하다. 혈연, 인종, 국적, 유사성, 가치의 공유 등으로 금을 그은 집단의 경계, ‘내 편’의 울타리를 좀처럼 넘어서지 못한다.
사람들은 외집단을 폄하하는 경향이 있으며 내집단보다 덜 도덕적이고 믿을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공감은 이 집단의 경계를 좀처럼 잘 뛰어넘지 못한다. 우리는 모든 사람에게 공감하는 게 아니라 혈연, 우정, 유사성, 공통의 유대를 가진 사람들에게 더 잘 공감한다.
공감의 능력이 확대되는 건 아름답지만 저절로 이뤄지는 것이 아니고 어렵게 익혀야 하는 일이다. 흔히 상상하는 것과 달리 공감의 확대는 어쩌면 감성이 아니라 이성을 발휘해야 도달 가능한 목표일지도 모른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폭력에 반대하는 개인의 인권의식이지 남의 아이도 내 자식처럼 돌보는 엄마의 눈, 전 사회의 ‘확대가족화’가 아니다. 모르는 사람이 아이를 때리는 것을 보았을 때 항의하고 신고해야 하는 이유는 사람이 더 약한 이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것을 용납해서는 안 되기 때문인 것이지, 우리가 모두 이웃의 아이를 함께 지키는 대가족 구성원의 마음자리를 가져야 하기 때문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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