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요약금지, 콜린 마샬, 어크로스, 2024(초판 3쇄)

 

 

 세상에서 가장 큰 한인타운에 와서

 

 

 하나의 외국어를 배우면 또 다른 하나의 자아가 생긴다는 말이 있다. 그 말처럼 내가 한국어로 쓴 글과 과거 영어로 써두었던 글은 사용하는 단어에서 사고방식 그 자체까지 거의 모든 면에서 다르다. 이 이중인격과 비슷한 상태는 한국에 오래 체류하는 외국인에게 축복이자 저주다.

 

 

 한국 정부는 서양인을 타깃으로 하는 광고 캠페인을 개발하면서 외국인의 의견을 전혀 수렴하지 않는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그 사실은 의아할 것이다. 1971년 독재자 박정희의 홍보기구로 설립된 문화부 산하 해외문화홍보원KOCIS에서 2년 동안 근무한 던바는 “사실 그들은 외국인들과 상의한다”라고 말한다. “문제는 그들이 외국인의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들은 모두 상의를 위해 그곳을 방문하는데, 대부분은 무엇을 바꾸기에는 너무 늦은 단계에 그곳을 찾는다.”

 

 

 전 세계적으로 주목받는 국가가 되었음에도 한국은 여전히 매력적이고 일관된 방식으로 스스로를 마케팅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 2017년 7월 <가디언>에 기고한 기사에서 나는 장소 브랜딩 컨설턴트인 사이먼 안홀트Simon Anholt의 말을 인용해 한국 브랜딩 책임자의 약점으로 “조급함, 객관성 결여, 지루한 전략, 잘못된 리더십, 홍보 효과에 대한 순진한 믿음, 빠른 해결책과 지름길에 대한 욕구”를 꼽은 바 있다. 

 

 

 1963년부터 1979년까지 한강 이북의 땅값은 2500퍼센트 상승했다. 그건 평균적으로 그리 나쁘지 않은 수치였다. 같은 기간 강남의 땅값이 8만~13만 퍼센트 상승한 것을 고려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똑 같은 고층 아파트가 사방에 즐비하다거나 전철로 한 시간을 이동한 동네가 출발한 동네와 똑같이 생겼다는 외국인들의 불만을 접할 때마다 나도 비슷한 생각을 한다. 

 

 

 한국어를 배우는 외국인이라면 충분히 짐작할 수 있겠지만, 명사 뒤에 붙는 ‘은/는’과 ‘이/과’라는 조사는 대부분의 서양인에게 오랫동안(어쩌면 영원히) 베일에 싸인 것이다. 영어에서는 이를 ‘주어 표시어’와 ‘주제 표시어’라고 부르는데, 한국어 교육학에서 확립된 많은 관행과 마찬가지로 한국어 학습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설명이다.

 

 

 한국인의 영어 이름은 의도치 않게(한국과 외국의 문화적 관행 차이 때문에) 한국인과 외국인 사이에 오해를 낳을 수도 있다. 외국인과의 상호작용을 위해 선택된 영어 이름을 외국인에게 알려주는 상황을 상상해보자. 그 상황은 그 외국인에게 상대가 실제 이름을 알려줄 만큼 자신을 존중하지 않는다는 메시지를 보내는 것이다. 

 

 

 상대적으로 한국에서 이름 호칭은 가정과 같은 몇몇의 장소에서만 사용된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에서는 회사 상사나 친척의 이름을 제대로 알지 못한 채 몇 년을 살 수도 있다. (최근 한 할아버지가 손자에게 자신의 이름을 불러보라는, 상상할 수도 없는 행동을 하라고 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그 이유는 이제 그 노인에게는 이름을 불러줄 어린 시절 친구가 거의 남아 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재즈와 전쟁, 사진과 영화를 포함한 다양한 주제들을 다루는 영국 작가 제프 다이어는 “지식을 가지고 책을 쓰는 것이 아니라 지식을 쌓으려고 책을 쓴다”고 말한 적이 있다.

 

 

 지방의 기본적인 사전적 의미는 ‘나라의 일부’다. 하지만 한국에서 지방의 의미는 사실상 ‘서울이 아닌 지역 모두’다. 미국에도 대도시가 몇 곳 있지만 서울과 같은 성격을 가진 대도시는 없다. 뉴욕이나 로스앤젤레스가 아무리 중요해도 그것이 아닌 모든 도시를 지방 도시라 불리게 만들 정도로 미국의 중심이 될 수는 없다.

 

 

 이날치는 판소리를 발전시킨 19세기 판소리 명창 이날치에서 이름을 따왔다. 밴드 멤버 대부분이 판소리 명창에게 직접 사사한 경험이 있음에도 이들의 음악에서는 ‘국악’의 엄격한 순수주의를 찾아볼 수 없다. 

 

 

 한국을 취재하는 모든 기자는 언젠가 자살에 관한 기사를 써야 한다. 

 

 

 최근 글로벌 미디어가 파악한 트렌드를 보면 한국에서 발생하는 여러 개인의 자살만큼이나 주목해야 할 자살이 있다. 그건 바로 ‘한국이라는 국가 자체의 자살’이다.

 

 

 미국 친구들이 왜 한국으로 이주하고 싶었느냐고 물어보면, 나는 한국 사람들이 여전히 미래를 좋은 것으로 여기기 때문이라고 대답했다. 한국을 오랫동안 관찰해온 사람들 중 한국의 경제 침체, 극심한 세대 갈등, 저출생, 점점 더 공포스럽고 강압적인 정부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은 그런 내 대답을 비웃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서울 거리에 있는 모든 사람이 ‘지금보다 더 나아질 수 있고, 또 그래야 한다’는 생각이나 기대를 품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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