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 버리기 기술, 마크 맨슨, 갤리온, 2024(초판 3쇄)
한발 물러나서 사태를 객관적으로 바라보면, 필레츠키 같은 영웅이 세계를 구하는 동안 우리는 모기를 때려잡고 에어컨 바람이 약하다고 불평만 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사람들의 모든 생각과 동기가 인간 존재의 본질적인 무의미함을 피하려는 끝없는 욕구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을 안다면, 어떻게 양심의 가책 없이 누군가에게 ‘좋은 하루 보내세요’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이 무한한 시공간에서 우주는 당신 어머니의 고관절 수술이 잘되어 가는지, 당신 자식이 대학에 입학하는지, 당신 상사가 당신이 스프레드시트를 기가 막히게 만들었다고 생각하는지에 신경 쓰지 않는다.
감정 뇌가 의식 차를 모는 이유는 궁극적으로 우리를 행동하게 하는 것은 오직 감정이기 때문이다. 행동이 곧 감정이기 때문이다.
이는 시대를 초월한 질문, 즉 ‘왜 우리는 해야 한다고 알고 있는 것을 하지 않는가?’라는 질문에 관한 가장 단순하고 가장 확실한 답으로 이어진다. 답은 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감정 뇌가 운전사라면, 생각 뇌는 길잡이다. 생각 뇌는 일생을 통해 작성하고 축적한 현실 지도를 무더기로 쌓아 놓고 있다. 목적지로 가는 방법과 대체 경로를 찾는 방법을 안다. 위험한 모퉁이가 어디에 있는지와 지금 길이 어디에 있는지를 안다. 자신을 지적이고 합리적인 뇌로 올바로 인식하며, 그것이 왠지 자신에게 의식 차를 통제할 특권을 부여해 준다고 믿는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렇지 않다. 대니얼 카너먼에 따르면, 생각 뇌는 ‘자신을 영웅으로 상상하는 조연’이다.
생각 뇌는 이런 싸움을 피하고 희망을 지키기 위해 감정 뇌가 이미 가겠다고 결정한 곳을 설명하거나 정당화하는 지도를 그린다. 감정 뇌가 아이스크림을 먹고 싶어하면 생각 뇌는 설탕과 칼로리 과잉에 대한 사실로 그걸 반박하는 대신 ‘나는 오늘 열심히 일한 만큼 아이스크림을 먹을 자격이 있어’라고 말한다.
만약 당시의 감정 뇌가 당신 배우자는 개자식이고 당신은 아무것도 잘못하지 않았다고 결정하면, 당신의 생각 뇌는 즉각적으로 배우자가 당신의 삶을 망치는 동안 당신이 얼마나 인내와 겸손의 화신이었는지 기억해 낼 것이다.
고통이 존재하는 곳에는 언제나 우월감과 열등감이 존재한다. 그리고 고통은 언제나 존재한다.
모든 경험에 동등화가 존재하는 이유는 동등화하려는 욕구가 감정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슬픔은 상실감을 보상하기 위한 무력감이다. 분노는 힘과 공격성을 통해 동등화하려는 욕구다. 행복이 고통에서 해방된 감정이라면, 죄책감은 찾아오지 않은 고통을 받아 마땅하다는 느낌이다.
동등화를 향한 욕망은 정의감의 근간이다.
우리가 어떤 것을 가치 있게 여기기를 그만두면, 우리는 더는 거기에서 재미나 흥미를 느끼지 못한다. 그러므로 그만두더라도 상실감이나 뭔가를 놓치는 느낌 따위는 없다. 오히려 과거를 돌이켜 보면서 어떻게 그렇게 어리석고 시시한 것에 그 많은 시간을 쏟았는지, 왜 중요하지 않은 문제와 명분에 그토록 많은 에너지를 낭비했는지 궁금할 뿐이다.
이것도 우리의 희망 대응의 일부다. 왜냐하면 동등화가 불가능해 보이면 감정 뇌는 차선책을 제시하기 때문이다. 즉 항복하고, 패배를 받아들이고, 자신이 열등하고 가치가 낮다고 판단하는 것이다. 누군가가 우리를 해칠 때, 우리의 즉각적 반응은 일반적으로 ‘그는 나쁜 놈이고, 나는 올바른 사람이야’다. 하지만 같은 입장을 만들 수 없고 정당하게 행동할 수 없을 경우, 감정 뇌는 유일한 대안적 설명을 믿게 될 것이다. 즉 ‘내가 나쁜 놈이고, 그가 올바른 사람이야’가 되는 것이다.
실직하면 단지 불쾌하기만 한 게 아니다. 당신은 그걸 중심으로 온전한 이야기를 구성한다. 수년 동안 충성했는데 빌어먹을 상사가 날 부당하게 대우했다! 난 회사에 헌신했다! 그런데 그 대가로 무엇을 얻었는가?
우리가 만들어내는 이야기는 몸에 딱 붙는 축축한 옷처럼 우리의 마음과 정체성에 착 달라붙는다. 우리는 그것을 가지고 다니며 그것으로 자신을 규정한다. 우리는 이야기를 다른 사람과 교환하며, 이야기가 자기와 일치하는 사람을 찾는다. 그리고 이런 사람을 친구, 내 편, 좋은 사람이라고 부른다. 그렇다면 이야기가 자기와 모순되는 사람은? 우리는 그들을 악마라고 부른다.
우리의 가치관은 은행 대출 이자와 같다.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심각해지고 더욱 강해져서 미래의 경험을 채색한다. 당신을 망치는 것은 초등학교 시절의 집단 괴롭힘이 아니다. 집단 괴롭힘 더하기 시간이 흐르면서 쌓인 수십 년 치 미래 관계에 당신이 제공한 모든 자기혐오와 자아도취다.
“부모가 된다는 건 끊임없이 아이 뒤를 졸졸 따라다니면서 아이가 뜻하지 않게 자신을 죽이는 일이 없도록 하는 것이다. 아이가 뜻하지 않게 자신을 죽이는 방법을 얼마나 많이 찾아낼 수 있는지에 놀라게 될 것이다.”
‘공정’을 손가락으로 가리키거나 ‘신중’을 그림으로 그릴 수는 없다.
잘 들어보라. 희망의 문제는 그것이 근본적으로 거래라는 사실이다. 즉 어떤 상상 속의 즐거운 미래를 대가로 놓고 현재의 행동을 흥정하는 것이다. 이걸 먹지 않으면 천국에 갈 것이다 그 사람을 죽이지 않으면 곤경에 처할 것이다. 열심히 일하고 돈을 모으면 행복해질 것이다.
희망이라는 거래의 영역을 초월하려면 반드시 무조건적으로 행동해야 한다.
칸트는 이런 무조건적인 행동을 하나의 단순한 원칙으로 요약했다. 인간을 절대 한낱 수단으로 취급하지 말고, 언제나 목적 그 자체로 대해야만 한다.
쾌락과 단순한 만족으로 가득한 삶을 추구할 때, 우리는 자신을 즐거운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취급하는 것이다.
파란 점 효과가 시사하는 바는 다음과 같다. 우리가 위협을 더 많이 찾아내려 할수록, 우리는 환경이 실제로 얼마나 안전하고 편안한지와 무관하게, 위협을 더 많이 보게 될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런 현상이 오늘날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습을 본다.
과거에는 폭력의 피해자가 됐다는 것은 누군가가 나를 신체적으로 해쳤음을 의미했다. 오늘날에는 많은 사람이 ‘폭력’이라는 단어를 자기를 불편하게 하는 말 또는 심지어 자기가 싫어하는 사람의 존재를 표현하기 위해 사용하고 있다… 예전에는 ‘집단 학살’이 특정한 민족이나 종교 집단을 물리적으로 대량 학살하는 것을 일컬었다. 오늘날에는 일부 사람들이 ‘백인 집단 학살’이라는 용어를 사용해서 동네 식당이 메뉴의 일부를 스페인어로 작성하는 세태를 개탄하기도 한다.
이것이 파란 점 효과다. 상황이 좋아질수록 위협이 없는 곳에서 위협을 더 많이 지각하고, 마음이 더 뒤숭숭해진다. 그리고 이것이 진보의 역설에서 핵심이다.
19세기, 사회학의 창시자이자 사회 과학의 초기 선구자인 에밀 뒤르켐은 저서에서 사고 실험을 했다. 범죄가 없다면 어떻게 될까? 모두 완벽히 정중하고 비폭력적이며, 모두 평등한 사회가 나타난다면? 아무도 거짓말하지 않거나 서로 상처를 주지 않는다면? 부패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러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갈등이 사라질까? 스트레스가 증발할까?......
뒤르켐은 아니라고 말했다. 사실 정반대의 일이 벌어지리라 생각했다. 그는 사회가 편안하고 윤리적일수록 우리 마음속에서 작은 경솔함이 더 크게 확대될 것이라고 말했다. 모두 서로 죽이기를 멈춘다 해도 우리가 그걸 반드시 좋게 느끼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는 그저 더 사소한 일에 대해 똑같이 화낼 것이다.
우리가 알게 된 건 문제에 대한 우리의 감정적 반응이 문제의 크기에 의해 결정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오히려 우리의 마음은 경험하리라 예상되는 스트레스 정도에 맞게 문제를 증폭하거나 축소할 뿐이다.
삶이란 그저 7점 수준의 행복 언저리를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 듯싶다…… 대부분의 사람이 대부분의 삶을 상상 속의 10점을 끊임없이 좇으며 살아간다.
행복이 ‘유행’이 된 건 과학과 기술의 시대가 도래한 후의 일이다.
고통은 인간 조건의 보편 상수다. 그러므로 고통으로부터 멀어지고 모든 해악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려는 시도는 역효과를 낳을 뿐이다. 고통을 제거하려고 노력하면, 고통이 줄어드는 게 아니라 오히려 고통에 대한 민감성이 증가할 뿐이다.
잘 산다는 건 고통을 피하는 게 아니라, 올바른 이유로 고통받는 걸 의미한다.
2011년, 나심 탈레브는 ‘안티프래질(antifragile)’이라는 개념에 관한 글을 썼다. 탈레브의 주장에 따르면, 어떤 시스템은 외력에 의한 스트레스를 받으면 약해지지만, 다른 시스템은 외력에 의한 스트레스를 받으면 강해진다.
당신의 삶이 아무리 ‘좋아’지건 또는 아무리 ‘나빠’지건 고통은 존재한다. 그리고 결국엔 감당할 수 있다고 느껴질 것이다. 그렇다면 유일한 질문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그걸 받아들일 것인가? 고통을 받아들일 것인가, 아니면 피할 것인가? 프래질을 택할 것인가, 아니면 안티프래질을 택할 것인가?
고통을 받아들이는 능력이 문화 차원에서 급속히 줄어들고 있다. 이 때문에 우리는 더 큰 행복을 얻지 못할 뿐만 아니라, 정서적으로 엄청나게 취약해지고, 이로 인해 모든 것이 그렇게 엉망진창으로 보이게 된다.
명상의 핵심은 안티프래질 연습이다. 즉 마음을 단련해서 끝없는 고통의 밀물과 썰물을 관찰하고 견디며 ‘자아’가 그 조류에 휩쓸리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고통은 가치관의 통화다. 상실의 고통(또는 상실의 가능성)이 없으면, 어떤 것의 가치를 전혀 결정할 수 없다.
많은 사람이 비교적 건강하고 부유할 때는 어떤 일이 일어날까? 이 시점에, 대부분의 경제 진보가 혁신에서 오락으로, 고통 개선에서 고통 회피로 바뀐다. 그 이유 중 하나는 진정한 혁신은 위험하고, 어렵고, 보람이 없기 때문이다….. 벤처 투자가 피터 틸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날아다니는 자동차를 원했지만, 그 대신 트위터를 얻었다.”
인터넷은 진정한 혁신이다. 다른 조건이 모두 같다면, 인터넷은 우리 삶을 근본적으로 낫게 만들었다. 훨씬 낫게.
문제는 우리다.
결국 인터넷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주기 위해 고안된 것이 아닌 셈이다. 그 대신, 인터넷은 사람들이 원하는 것을 준다.
아마도 문제는 시가를 털거나 사악한 고양이를 쓰다듬으며 엄청나게 많은 돈을 벌고 있다는 사실에 발작하듯 웃어 대는 탐욕스러운 경영진이 아닐 것이다.
아마도 우리가 원하는 게 형편없기 때문일 것이다.
더 크게 헌신하면, 더 심오한 깊이를 얻을 수 있다. 헌신이 부족하면 피상적일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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