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ACE공간, ISSUE 687, What the Harbinger Project Sets Forth

 

 

 

 과거 중소 규모의 건물을 다수 작업해 보니 결국 시공사가 적자를 보아야 건축가가 포트폴리오를 만들 수 있는 구조더라. 시공사와 건축가 간 호혜성이 없다. 

 

 

 돌이켜보면 작업에서 가장 의미심장했던 순간은 당구대도 넣고 작지만 샤워탈의실도 갖추고 교사대기실도 만들고 이것저것 복합 기능을 섞어보려던 학교가 장고 끝에 탁구실을 그냥 탁구실로 두기로 하며, 탁구실이 탁구실이 되기로 한 결정이었다. 탁구대 사이 적당한 간격을 빼면 세상에서 제일 필요한 게 없어 보이는 탁구실이 되기로!

 

 

 앞서 이야기가 중요하다고 했는데, 힌지드 스페이스가 되면 거기서 만들어질 수 있는 상황이 더 풍부해진다. 평소에도 내가 작업하는 방식을 소설가에 비유하곤 한다. 특정한 상황을 설정하고 인물을 등장시킨 다음, 캐릭터를 부여해 등장인물들이 이 구조 안에서 놀게 하면서 이야기를 완성해가는 걸 즐긴다. 세련된 언어로 다듬는 것은 내 역할이라 생각되지 않더라. 여러 번 퇴고하는 것도 내 몫은 아닌 것 같다.

 

 

 나와도 완전 반대다. 남의 간섭을 받지 않는 설계공모가 내게는 힐링 프로젝트인데. 우리가 학교 다닐 때만 해도 건축가를 선비처럼 생각했다. 스승격인 4.3그룹 세대들도 선비 정신을 이야기하며 전통 건축 답사를 다니지 않았나. 그래서 자기 건축을 이야기할 때 어떤 철학이나 개념을 정리해야 한다는 강박이 있었다. 하지만 우리 때부터 건축가가 선비에서 장인, 그러니까 중인中人 정도로 내려온 것 같다. 상업적인 일도 많이 하지만 테크니션 쪽으로 기운 분위기다. 요즘에는 건축학과 학생들을 보면 지나치게 경도되어 있다는 생각도 든다. 테크니컬하게는 잘하는데 이게 맞는 방향인가 고민이 되더라.

 

 

 제주도는 우리 국민 대부분이 좋아하는 곳입니다. 생각해보면 제주도에 대한 시각은 상당수가 서울에서 바라보는 관점입니다. ‘제주’라는 지명 자체에 이미 ‘물 건너 있는 고을’이라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구술집의 서문에서도 적었지만, 이밖에도 상경, 낙향, 귀양, 연북정과 같이 서울을 의식한 표현이 많습니다. 제주도에서는 태생적으로 서울의 시선이 중요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지역성을 비롯해서 제주를 바라보는 관점이 모두 서울이나 육지 중심인 것이 과연 온당한 것일까요?

 

 

 ‘장면’은 실제로 공간이 작동하는 순간을 포착하는 거라고 생각해요. 매직 아워가 아닌 애니 아워any hour. 아무 때나 불쑥 찾아가 정돈되어 있지 않지만 차라리 와글와글하고 생활감이 넘치는 구체적인 작동인 단면이 ‘장면’이에요.

 

 

2023년 경상남도 거창군에 외국인 근로자를 위한 첫 공공 기숙사가 들어선다는 소식이 들리더니 이제는 충주, 당진, 군산 등 열 곳 넘는 지방에서 같은 사업이 추진 중이다. 외국인 농업 근로자가 7년 사이에 44배 증가했다는 통계를 굳이 들추지 않아도 중소도시의 이질적 거리 풍경부터 정책까지 먹고 사는 것에 관련한 모든 것이 그들의 존재를 가리키고 있다. 어느 신기한 동네의 진풍경이라 이야기하게인 이미 늦었다.

 

 

 한 생선가게에서는 서남아시아계 외국인이 생선을 팔고 있으며, 알 수 없는 언어로 쓰인 표지판이 걸려 있다. 야채가게에서는 외국인 종업원이 외국인 고객을 응대하고 있고, 사장으로 보이는 내국인은 멀리서 지켜보고만 있을 뿐이다. 

 

 

 조선시대 읍성과 외국어 간판이 나란히 공존하고, 전통시장 안에서는 외국인이 조리하는 한국 전통음식을 외국인이 소비하며, 쉬이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가 통용되고 있다. 심지어 조선시대 향교와 외계의 종교 사원이 길 건너편에서 서로를 마주보고 있다. 가장 이국적인 외계의 존재가 가장 전통적이고 내밀한 지역에 위치한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