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하룻동안 어머니 몸에 바늘이 50번 이상 들어갔다 나왔다. 다르게 말하면 쑤셔졌다.
새 혈관을 찾아야 하는데 손가락에서 발가락까지 쓸만한 혈관들은 모두 진작에 사용되었고
그사이 모든 혈관들은 더욱 쇠약해지고 있었다.
온몸이 퉁퉁 붓고 혈관과 지방 사이 붕괴된 모세혈관 주위에 들어가다 멈춘 수액들이
조금씩 웅덩이처럼 고여있다.
세사람의 의사와 두 사람의 간호사를 거쳐 마침내 오늘부터 이틀내지 삼일 동안 바늘이 정착될,
청계천 마냥 수액을 쏟아내고 있는 곳은 다리와 다리 사이 사타구니에 있는 좌측혈관이었다.
이곳의 우측혈관도 이미 지난주에 사용되었다.
8일 동안 물 한 모금 반, 토마토 쥬스 한 병 반을 입으로
30여 개의 영양제며 항생제며 진통제가 담긴 약병을 온몸으로 잡수셨다.
잘못 찔린 바늘에 온몸이 찢어지듯 요동치실 때, 변이 한 번 나왔다.
요도에는 플라스틱 호수가 이어져 발정기를 지난 숫말의 성기처럼 침대 바깥까지 늘어져있다.
나는 규칙에 의해 70시간 이상 머물 수 없는 응급실에 죽음을 앞두었다는 동정적 이유로
어머니와 8일 째 머무르고 있는데, 그 사이 중환자실에서는 1인용 텐트에 실려
시체 다섯 구가 빠져나갔다.
아이도 하나 죽었고, 수술하면 30%, 안하면 0%의 환자가 수술 들어간 후 소식이 없고,
첫사랑을 쏙 빼닮은 한 명의 여자를 보호자들 중에서 발견했고,
그 여자가 자신의 어머니 곁에서 한치도 떨어지지 않아 속상했다.
지금 건너편 침대에는 새로 들어온 노인이 마취 없이 산채로 왼쪽 옆구리에서 무슨 장까지 바늘이 꽂혀져 아버지! 아버지! 외치며 몸부림 치고 있고, 나의 어머니든가, 좌측환자든가, 우측환자든가, 이들 중 한 명이 방귀를 뀌었다.
어머니는 토할 때는 녹색 액체를 뱉고, 사람을 알아보지 못하며, 지나치게 솔직하고,
생각이 있는지 없는지 확신할 수 없다. 아버지는 어머니가 다 듣고 있고 (속으로는)알아본다는 주장이고, 나로서는 반대입장이다.
다리를 굽히면 8시간 만에 꽂아넣은 바늘이 무소용이 되기 때문에 다리 한 쪽을 묶어놓았으며
그래도 굽히자면 굽힐 힘이 남아있기 때문에 나는 꼼짝없이 옆자리를 지키면서,
평소에는 관심도 없던 TV가 보고싶다고 생각한다. (TV는 훌륭한 마취제이다)
잠깐 대기실을 지날 때 방영하던 프로그램은 입양간 아이를 입양 보낸 부모와 만나게 해주는
<만나러 갑니다>라는 저질 쇼프로그램이었고, 그나마도 제목이 일본의 베스트셀러 책 제목과
같았고, 5월 5일 일요일 저녁 6시 44분이었다.
입양아와 입양아 어머니보다 김재동과 한정은이 TV에 노출되는 시간이 더 많은 피할 수 없는
<쇼>였고 그런 사실을 은근슬쩍 감추면서, 사실 주인공은 입양된 여자아이와 23년 만에 만나는
그 어머니라고 시청자를 살짝 속이고 있는 저질프로그램이다. 시청자들은 대부분
입양아나 입양 보낸 어머니와 감정이입이 되기보다는, 김재동이나 한정은, 그리고 방송기획측
의 입장에 감정이입을 해서 무언가를 해내고 지켜내는 듯한 착각을 일으킨다.
무엇보다 시도 때도 없이 노출되는 전혀 근거없는 추측자막은
"너무나 가슴 아팠던 어머니", "목이 막히는 00씨" 등은
행여나 시청자가 이와 다르게 영상을 판단할까봐 상상과 관찰의 여지를 주지 않고
관객의 수용과정까지도 각색하려한다.
다큐멘터리인 척 하는 한 편의 쇼드라마의 대본성이 너절하다.
23년 동안의 두 사람의 인생을 방송작가가 자막으로 요약해서
가장 감동적으로 느낄만한 순간에 집어넣는다.
나는 쇼를 부정하지 않는다. 다만 쇼가 아닌척하는 쇼, 흥미 위주로 가공된 다큐멘터리,
시도 때도 없이 블라인드 작용을 하는 나래이션과 자막 등이 몹시 불쾌하다.
8일 째의 응급실에서 나는 어떻게든 불쾌함을 표시할 수밖에 없다. 이곳에 적응해가고 있는
나에게도 그렇다. 환자에 대한 애정과 관심과 열의와 태도가 변해가는 것은 불쾌하고
순응할 수밖에 없는 일이다.
그에 비해 간호사들이나 의사들의 철저한 직업적 마인드는 감탄할만 하다. 이들은 봉사생명체가
아닐까. 물론 이들이 냉정하다고 아버지는 속상해하시지만, 불과 8일 사이에 5명이 죽고,
매일 30명 이상의 위독한 환자가 들이닥치고, 때로는 한 명의 늙은 여인의 부드러운 살에
하룻동안 50번 이상 바늘을 쑤셔대고 피를 닦아야 하는 상황 속에서
거리감 없이 어떻게 빠르고 적당한 처리가 이뤄질 수 있겠는가.
이들이 다수의 환자를 대할 때 냉정한 면이 없지 않으나 분명 이들은 우수한 봉사생명체이며
쇼크 경련으로 죽어가는 어머니를 세 번이나 다시 살려낸 뛰어난 전문가들이다.
온몸을 다해 소리치고 괴로워하고 안쓰러워하다 3일만에 뻗어버리고는 하는 무책임한 보호자들!
에 견줄 바가 아닌, 진정한 봉사생명체라 할 수 있다.
만약 전문 간호인들이 감정적인 보호자들처럼 행동했다면
3일 만에 쓰러진 척 하거나, 몰래 TV를 보러가거나, 의도적으로 자명종을 꺼놓고서
지독하게 피곤했던 모양이라고 교대자에게 사과하게 되었을 것이다.
혹은 환자보다 가족들이 더 힘들다고 담합을 하거나,
자신이 방귀 껴놓고서는 어머니가 꾼 모양이라고 과장되게 구라를 치거나,
위문객들에게 환자보다 더 아픈 표정을 지어보이며, 팔짱을 끼거나 신음을 하고,
자신이 옷을 갈아입혔느니, 똥을 치웠느니, 모든 걸 지켜봤느지 하는 둥
향후 술자리에서 늘어놓을 레파토리를 짜집으며 잠을 참거나,
의사가 되지 못한 꿈을 배설하듯이
다른 환자들을 위문할 기대에 부풀어서
아는 사람이 입원하면 빈손으로 부리나케 달려가서 자신이 의사라도 되는 듯이
남의 환자를 지켜보며 이건 이래서 이렇고 저런 저래서 저런 거라고
아무도 듣고 싶어하지 않고, 의학적 데이터가 전혀 없는 경험담을 늘어놓고 오는 것이다.
실제로 이곳 응급실의 보호자들이 하는 일이란 거의 그런 것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