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때인가 부터

자석에 들러붙은 철가루처럼

떼어내도 떼어내도 꺼림직하게

과연, 내가 잘 살고 있는 걸까,

하는 생각이 든다.

 

<앞만 보며 간다> 는 말도 있고

<10년 앞을 내다봐라> 는 말도 있다.

 

<20대에 해야 할 30가지> 라는 책도 있고

<죽기 전에 해야 할 ...> 라는 책도 있다.

 

어떻게 살아야 잘 사는 걸까.

 

"앞을 보되, 항상 발밑을 보듬으며, 내가 걷는 행보 하나하나를 충분히 탐색하고 인정하는 걸음만 걷자" 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앞만 보지 말고, 두리번 두리번 거리면서, 온갖 것들을 다 둘러보되, 발밑을 의식하지 말고 뜀 뛰는 새처럼 가자"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어제는 노인병동 입원실에

죽음을 앞둔 어머니를 모신 40대 장남이 술이 취해 들어와서는

"나도 괴롭다고!"

"4살 이후로 나한테 해준게 뭐가 있어!"

"사랑한다고 말해 봐!"

"엄마, 난 이렇게는 (당신처럼) 안 죽을 거야!"

라고 소리쳤다.

 

짐작 할 수 있겠지만, 이 어머니는 입원한지 두 달 째, 똥을 한 번도 못누었을 정도로,

아무 것도 먹지도 못하고, 뼈만 남은 아프리카 아이처럼 누워서,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다.

 

어머니를 간호하는 중에 나의 아버지는 나를 불러내더니

"나중에라도 나는, 중환자실에는 절대 넣지 말라고! 알겠어!"

라고 윽박지른 적이 있다.

 

별 걱정을 다, 라고 생각했지만 사실

 

아주 오래 전부터 나는 어떻게 죽을 것인가를 모색하고 있다.

 

예를 들어, 선량하게 살아오신 나의 어머니는, 죽음 선고를 받고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보통 4단계를 겪는다고 하는데)*

분노에 휩싸여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대로는 못죽어! 억울해서 이대로는 내가 못죽어!"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이고 어떻게 살아왔는가 하는 것은,

그 사람이 죽음을 어떻게 맞이하고 수용하거나 대처하는가를 보면 어느 정도 알게 되는 것 같다.

남 눈치를 많이 보는 나로서는 결국,

나와 남에게 얼마만큼 인정 받는 죽음을 맞이할 수 있을 것인가가,

내 삶의 관건이라고 할 수 있다.

 

그건 어떤 식으로 죽느냐, 자살이냐, 병이냐, 사고냐, 그런 개념이 아니라,

죽음을 앞둔 상황에서 어떤 나다운 태도를 지닐 수 있느냐에 관한 것이다.

 

쇼팽은 죽는 그 순간에 피아노 연주를 들려달라고 했고,

또 어느 희곡작가는 "덤벼라, 죽음아!"라고 말한 뒤에 죽었고,

또 어느 여배우는 "일요일에 죽을 수 있어 행복해요"라고 말했고,

또 멕시코의 여자화가는 "행복한 외출이 되길, 그리고 돌아오지 말길"이라고 말하고

침대에 실려 나간 뒤 정말로 죽어 돌아왔다고 한다.

 

이순신장군은 "내 죽음을 적에게 알리지 말라!" 하셨다는데, 대부분은

"살려줘! 살려줘!" 그랬을 것으로 추측이 된다.

 

 

이렇게, 기억에 남는 남의 얘기만 하다보면, 죽음은 멀게 느껴지고 만만해보인다.

하지만, 정말 죽음을 앞둔 그 순간에 내가,

나의 힘으로 나다운 태도를 지닐 수 있다는 건 분명 놀라운 일일 것이다.

 

나의 어머니는 약 50여년간 불교신자였는데,

죽음선고를 받고 교회를 다니기 시작했다.

어머니가 얼마나, 죽음을 무서워하고, 누군가의 도움을 필요로 했는지 알 수있지만,

나는 함께 가자는 어머니의 말을 정중히 거절했고,

"어머니가 교회 가는 건 좋아요. 이왕 가는 거 열심히 진짜로 기도하세요. 하지만, 거기 아줌마들이 아들도 데려오라고 해서 그랬다고 데려가려 하는 건 포기하세요."라고 말했다.

정말이지 무슨 책 읽듯이 말했다.  

 

대학 3학년 때, 병원 영안실에 전화를 해서 시체 닦는 아르바이트를 구하려고 했고

그 이후로도 몇 번 시도했는데 어떤 루트나 가망성도 찾을 수 없었다.

시체 닦는 아저씨들은 분명 있지만, 시체 닦는 아르바이트는 없는 것 같다.

예전에는 있었다고 하지만.

 

춘천에 화장터가 단 하나뿐이 없는데,

그곳에서 일하고 싶다고 전화 했다가 술에 취했는지

전화를 받던 할아버지가 갑자기 고함을 치셨다.

"학생이면 공부나 해!"

 

어느 나라나 그렇겠지만, 죽음을 모색하려 하는 것은 환영받는 움직임이 아니다.

 

그러나 나는,

"준비된 사수로부터 사격!"이라는 구호처럼

 

"준비된 사수로부터 죽음!"라는 구호를 받았을 때

명확하며 납득할 수 있는 침착한 행동을 하고 싶다.

당황해서, 누군가 쏘기 시작하니까 덩달아 쏘는 집단행동,

쥐 무더기 속에서 강물로 뛰어드는 쥐떼들의 모방행동에 휘말리고 싶지는 않다.

 

권가야는 내가 좋아하는 한국인 만화가 중 한 명인데

<남자이야기>에서 이런 대사를 만들었다. *

 

"남자에게는 적극적으로 죽음을 모색해야 할 때가 있다."

 

남자에게만 있는 시기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사람에게는, 죽음을 모색해야만 하는, 적극적인 시기가 있어야 한다고 본다.

 

그렇지 않으면, 도살장으로 끌려들어가는 소처럼,

어쩔 줄 모르는 표정으로,

죽기는 싫은데, 피할 수는 없잖아, 라는 식으로 엉성하게

죽음을, 당하게 될지도 모른다.

 

내가 생각하는 죽음은, 만들어 가는 것이고, 소유하는 것이다.

자기만의 태도를 규정하거나 나름의 답안을 제출하는 것이다.

 

비유하자면 나는 밤하늘처럼 죽고싶다.

캔버스의 바탕처럼 죽고싶다.

 

사실, 이해된 발언이 아니라, 막연한 낭만적 외침에 가깝다.

그래도 글에는 마무리가 있어야 하고,

어색하고 어린,

죽음을 지적하고, 있다면 오라, 고 하는 느낌의

그런 지금의 내가 할 법한 말이다.

 

캔버스의 바탕처럼 죽고 싶다.

 

 

 

 

 

* 간호학과에 다니시는 피데이님은 죽음을 수용하는 인간의 4단계.. 무슨 분노, 회피, 수용이 들어가지 않나요? 가르쳐 주시면 좋은데..

 

 

* <남자 이야기>의 원작은 좌백의 <대도오>라는 무협지이다.

좌백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무협작가이며, 그의 부인은 진산인데,

한국 최초의 여자 무협작가이다.

이 부부는 다들, 놀라운 작품을 써내고는 하는데, 도피성 문학이 아니라,

순수문학에 가까운 무협의 세계를 보여준다.

뭐가 다른가 하면, 흥미와 재미와 시간 때우기가 목적이 아니라,

사람이란 무엇인가,를 무림이라는 공간을 통해서 보여내려 한다는 것이다.

진산의 경우, 국내 최초로 단편 무협을 쓰기도 했는데, 단편무협이란 그 자체로

기존 무협의 한계를 뛰어넘는 것이다.

 

* 어머니의 교회 가자는 부탁에도 한 점 흔들림 없이 거절한 걸 보면, 내가 꽤 냉정하다는 걸 알 수 있다. <그녀>님이 글쓰는 사람들이 참 냉정한 것 같다, 고 말한 적이 있는데, 나도 그래서 그런 걸까. 하지만, 반면 내가 좋아하는 여성이 같이 교회가자고 하면 같이 갔을 것이다. 무슨 차이가 있는가 생각해봤는데 대략 두 가지 정도가 있는 것 같다. 하나는, 어머니는 내가 거절해도 떠나갈리 없지만 여자는 떠나갈 지도 모른다는 공포감. 다른 하나는, 어머니와 교회 가는 건 하나도 재미 없지만, 여자랑 같이 가면 교회도 데이트 장소가 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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