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가장 많이 가장 열정적으로 무엇인가를 노트에 적어나가던 시절에

나는 아마도 불만의 에너지로 그 모든 것을 적어나갔을 것이다.

만약 누군가 내게 연봉을 주고 왜 성장하는 사춘기 청소년이 불만을 갖는가에 대해

자료를 모아 보라고 한다면 아마 평생 직장으로 삼을 수있을 것이다.

그건 아주 세세한 것들의 차이에서 기인함으로.

 

그리고 그 세세한 것들은 사실 모두 말로 인한 것들이다.

말 한 마디를 목숨 걸고 하지 않으므로, 자신이 한 말과 다른 행동을 했을 경우

살해되지 않으므로, 그게 모든 문제의 시작이라고 보았다.

 

올 여름에는 꼭 (  ) 하자.

올해 안에 꼭 (   )을 사줄게.

 

라는 약속의 문제에서부터,

그리고 보다 심각한, 아이들은 중요하게 생각하는 약속을 어른들이 사소하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는 문제에서부터,

 

그래, 잘한다 잘해.

잘났다.

그렇게만 해봐.

자식이라고 하나 있는게.

 

라는 악마의 언어를 사용하는 문제로부터,

어째서 대뜸 어른들은 알게 모르게 아이들에게 비아냥거림이라는 비인간적 언어를 자연스럽게 가르키는가라는 문제로부터,

 

어린노무 자식이!

대가리에 피도 안 마른게!

어른 말씀하시는데 어디서!

 

라고 하는, 문장 어디서도 이해의 여지가 없는 말을 어른 구성원이라는 파워클럽의 힘으로

강제 윤리화 하는 데에 대한 문제에서부터,

 

다섯 살 자식에게는 신데렐라와 백설공주의 사랑을 들려주더니

스물 다섯 살 자식에게는 현실에 맞게 결혼 하라는, 사랑이 밥 먹여 주냐는,

 

자녀의 나이에 따라 전혀 엉뚱하게 진리를 설법하는

컨테이너 벨트 같은 설법 체계 공정의 문제로부터,

 

친구와는 사이 좋게 지내야 해요, 라고 말하는 한 편

저능하거나 집안이 별로 안좋게 보이는 애와는 놀지 못하게 하는

 

매우 수준 높은 딜레마 학습에 이르기까지,

 

왜 아이가 최초의 배움으로부터 최후까지 멈춤 없는 배신의 겪음을 통해 성장해야 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성한 코메디의 완성을 위해서 진정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에는 사랑이 넘치거나 인간은 사랑을 지니고 있다고 눈 가린 채로

안대에 사랑이라고 써서 하루 30분 이상 씩은 꼭 이것으로 눈을 가려야 한다고 명령하는

그러한 도덕체계를 만드는 데 일조를 해야 하고 그것을 강요받는지,

 

에 대한 사례를 아마도 평생 모으며 살 수도 있을 것이다.

세상은 그런 것들로 가득차 있으니까.

 

그러므로 과연, 사랑이라고 쓰여진 눈가리개를 쓰고 있을 때를 제외하고,

혹은 사랑이 몇 알 맺혀 영그는 콩깍지로 눈을 가리고 있을 때를 제외하고,

대부분의 시간에 나는 무엇으로 글을 써야 하는가.

 

그것은 아마도 사랑 할 수 없음으로, 가 되지 않을까. 

내가 컴퓨터 앞에 앉아 검색하는 대부분은 놀이, 연예, 아름다움, 미술, 소설, 영화,

이런 것들인데 그러는 한 편,

 

코소보, 아프리카, 굶주림, 사기, 배신, 장애, 불평등, 이런 것들은 스스로 검색하려 하지 않는

이 나의 사랑은 얼마나 조잡스러운지 모른다.  

눈 앞에 있어야 사랑이고 눈 밖에 있으면 사랑이 아니라는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눈에 보이는 세상보다는 보이지 않는 세상이 현저하게 많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다는 것.

 

인지함에도 불구하고 인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숨기고 눈 앞에 잘 익은 수박이나

고개 숙인 옥수수, 찜그릇 같은 것만을 의도적으로 바라보며 숙고한다는 것,

더 큰 것을 보아 내 그릇이 찢어질 것을 염려한 다는 것.

 

정자, 혹은 난자 때부터 배워온 것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다는 것.

 

어째선지 길 잃은 강아지 한 마리를 위해서 방해가 되는 것이라면 가족이라도 모두 헤쳐서는 절대로 안되는 것이라고 철떡같이 믿고 있는 세상에서 견뎌야 한다는 것.

 

그저 어중간하게 견뎌야 한다는 것.

 

내가 생각해 온 것들, 써온 것들 중에 사랑으로 쓴 것은 얼마나 되는 걸까.

스승의 날에 억지로 쓴 편지들은 사랑으로 말미암아 쓰여진 걸까.

어버이날에 숙제처럼 쓴 편지들은 사랑으로 복받쳐 쓰여진 걸까.

 

나는 스승을 사랑해서 사랑해요 선생님이라고 쓴 걸까,

나는 어버이를 그 순간 진정 사랑해 마지 못해 그렇다고 쓴 것일까.

혹은 그렇게 해야 그 순간 그냥 저냥 화목하게 넘어갈 수 있기 때문에 그런 것일까.

 

내가 배운 사랑이란 [귀찮은 것을 조금 참고 견뎌내는 것]을 말한다.

 

나의 장문의 글들, 장문의 토로와 치사스런 비유들은 사랑을 말하는 법이 드물다.

왜냐하면 언제나 진정으로 바라보고자 하면, 사랑이란 정체 불명에 형체 모호에

증명 불가능한 데다가, 거의 대부분 자기 식대로 해석되어 모호해지고 편리에 맞춰

변형에 변형을 거듭하는 데다가, 일정 순간이 지나간 뒤에 편할 데로 '사랑했었네'라고 말할 경우, 기존에 쌓여온 사랑 이미지에 얼레벌레 섞여 묻어서 내 인생에 사랑했었네 라고

병신처럼 웃으면서 살아 갈 수 있게 해주는 그런 것이기 때문이다.

 

더불어 생각없이 하는 것도 사랑이 될 수 있고, 자식을 자살로 몰고 가더라도 사랑이 될 수 있고,

결과에 상관없이 사랑이 될 수 있으며, 대부분은 사랑이라는 말 앞에서 그럭저럭 넘어가주고

그런 법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사랑이란 어떤 형태로든 상대방을 무시하기 일쑤이며, 무엇보다 가증스러운 점은, 사랑한다는 행위가 스스로에게 보람을 준다는 것이다. 내 삶의 이유가 불확실한 자들, 번민하는 자들은 따라서 사랑을 하면 된다. 그것이 맹목적이더라도, 아니 그럴 수록 더욱, 사랑은 절대적인 보상을 해준다. 자기만족이라는.

(나치와 일본군과 십자군들만큼 자기 무리를 사랑했던, 그러면서 살해를 즐겼던 무리가 있을까. 아, 그래 황건군도 그랬다나, 어디에나 널려있다. 맹목적 사랑이 주는 쾌락은.)

 

그러므로, 우리들은 사랑이라고 쓰여진 눈가리개를 쓰고서 데이트를 하면서 실실거리다가, 잠시 눈가리개가 늘어나 흘러내린다거나, 뭔가 욕구하던 것이 채워지고 나면 다툼이나 하면서, 다툼도 사랑이니 다툼도 정이니 하면서, 다시 한 번 제 2차 자기만족을 하고 나면 된다. 한 해 낙태아가 60만이야 넘건 말건, 노숙자가 얼마건, 밥 굶는 청소년이 얼마건, 강간 당하거나 학대 당하는 이들이 얼마건, 언제 그런 일이 일어나건, 처벌이 어떻건, 정의가 어떻건, 그런 건 그냥 살며시 넘겨버리거나 뒤집어 놓으면 된다.

 

우리가 배운 사랑이란 그런 거니까. 내가 그녀에게 건네준 초코렛이 맛만 좋고 엔돌핀 형성만 잘 해주면 되지, 그 코코아를 채집하는데 착취당하는 아이들이 있건, 속임수가 있건, 판매장에서 부당하게 짤린 알바생이 있건, 임금착취를 당하건, 해외노동자라고 업신 여김을 당하건, 내다버린 종이포장지를 주워 리어카에 싣고 떠나는 할머시들이 있건, 그런 건 우리 사랑에는 포함이 되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 역시 그런 것에는 관심이 없고, 내 블로그 방문자와 답글들 교감 게시판, 그리고 내 사랑 TB와 내 미래와 삶의 여유, 여행, 그런 것들에만 눈가리개에 구멍이 살포시 뚫려 있으므로 우리의 사랑은 그런 것이라 해두자. 그리고 나는 결국 사랑하지 않음으로 인해 이 모든 걸 쓴다.

 

우리의 사랑은 밤 열 한 시, 소주방이나 호프집에서 사랑했었네, 질질거리다가 카드로 긁어 계산하고 뒤늦게 속쓰려하는 그런 것임을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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