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을 먹고 있다.

아침식사가 영어로 기억나지 않아 당황스럽다.

인간의 꼬리뼈가 퇴화될 때 이런 기분이었을까.

하도 영어와 무관하게 살다보니 익스큐즈 미, 라든지 블랙바스트, 라든지

스펠이 기억나지 않는다. 훗.

 

아무튼 아침을 먹는다.

거의 블록버스터 급의 화려함이 느껴진다.

먼저 계란을 두 개 삶는다. 맛소금에 깨를 넣는다. 삶은 계란 완성.

냉동실에서 도투락 냉동만두를 꺼낸다. 열 개를 찜통에 넣고 찐다. 찐만두 완성.

오리온 초코파이를 냉동실에서 한 개 꺼낸다. 천천히 녹인다. 초코파이 아이스 완성.

 

피곤하다.

나무젓가락 껍데기와 계란 껍데기와 초코파이 껍데기와 빈 물병을 치워야 한다.

그리고 복숭아 축제를 구경 가야지.

그리고 수영을 두 시간 해야지.

 

어제는 전주 끝에서 전주 끝까지 세 시간을 땡볕에 걸어다녔다.

전주가 갈수록 마음에 든다.

올해 본 블록버스터 영화들이 떠오른다.

 

아일랜드, 우주전쟁, 베트맨 비긴즈, 마다가스카 등.

 

또 조만간 킹콩이 나올 것이고 이것 저것들이 나올 것이다.

 

그런 영화들을 보다 보면 돈이란 것이 참 싸고 별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돈이 돈처럼 안보이고 장난감처럼 보이게 된다.

30억 달러짜리 장난감이라든지, 6천만 달러짜리 놀이개 같은 것이다.

 

그러고 보면 놀이기구들도 블록버스터화 되어서 얼마 전 롯데월드에

얼마짜리 기구가 들어왔다느니 하는 말들을 듣고는 한다.

그러고보면 놀이스러운 수영장, 케러비안 베이가 수영장 중에서도 가장 비싸고

이래저래 노는 꺼리에 돈이 가장 많이 크게 드는 것도 같다.

 

그렇다면 어느 정도는 놀기 위해서 돈을 번다고 할 수 있는데 과연,

예전에 들었던 말이 떠오르고 수긍이 간다.

 

"현대인들은 돈을 축적하기 위해서 젊음을 소모하고, 나이가 들어서는 젊어지기 위해 돈을 소모한다." 던가...

 

젊을 때는 노후에 애착이 가고 늙어서는 젊음에 애착이 가는 모양이다.

오늘 아침에 또 혼자 방에서 눈을 뜨고 10여 분간 죽는다는 상상에 무서워했다.

정말 믿기지 않는다. 자고 나면 눈을 뜨는 것이 당연한데, 죽다니.

사라지다니.

 

한 편으로는 사는 것이 더 웃기고, 자살에 긍정적이고, 죽음을 평화라고 떠벌이기도 한다.

그리고 한 편으로는 죽는 것이 무섭고, 불로장생하고 싶고, 현세를 누리고 싶기도 하다.

 

에이, 참.

초코파이가 덜 녹아서 딱딱하다.

돈, 돈, 돈이 좋고 중요하기는 하다. 하지만 내 삶을 블록버스터로 만들고 싶은 마음은 없다.

블록버스터란 주인공이 아침 식사를 하는 중에 어디선가 폭탄이 터지고 자동차가 날아들고

밥 한 끼 먹을 시간 없이 분주하다가 배신을 당하고 거세게 싸우다가 결국 유치해지는 것이 아닌가.

 

삶은 계란 두 개, 초코파이 아이스 하나, 찐 만두 열 개로 나름대로 불록버스터급 연출을

하면서 폭탄 터지듯이 만두를 씹고 초코파이를 부메랑처럼 던지고 데구르르 굴러보지만

어째 아침의 엉긴 기운은 쉽게 가시지가 않는다.

 

블랙바스트 스펠을 찾아볼까 하다가 모르는 채로 오늘을 견디기로 했다.

egg 정도는 아직 기억이 나니까, 점차 놓아버리고 잊어버리고 잊혀지는 것을 견디기로 했으니까.

또 한 번의 아침식사가 떠나간다. 아쉽다. 좀 더 맛있게 먹을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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