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러독스의 세계>, 윌리엄 파운드스톤, 뿌리와이파리,2005

 

(나는 이렇게 도발적인 책들이 좋은데, 그 이유는 이 책 한 권을 읽으면 아마도 스무 개 이상의 글을 (각기 다르게) 쓸 수 있을 것 같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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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도 실재세계에서 다소 작위적인 범주를 사용한다. 어떤 사람이 시카고에서 지금이 5시라고 말하면 실제로 그는 서경 82.5도의 서부이면서 서경 97.5도의 동부이되, 이 경계선은 (미국) 중부 표준시를 준수하느냐에 따라서 다소 달라지는 한 지역에서 지금이 5시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은 동부시간대로 보면 6시이고, 서부시간으로 하면 4시이며, 세계의 다른 지역에서는 다른 시간이 된다. 지금이 언제건, 지금은(어느 곳인가에서는) 모든 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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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리학자 콰인이 지적하였듯이 물리학자들의 관점으로 보면 색의 개념은 작위적이다. 빛은 여러 파장의 연속체로 오며, 거기서 우리가 '초록'이라고 부르는 그 파장 영역을 특별히 구별할 어떤 이유도 없다. 우리가 외계에서 온 어떤 존재에게 '초록'이 의미하는 바를 설명하려 한다면 "초록은 우리가 4,912옹스트롬 보다 크고 5,750옹스트롬보다 작은 파장의 빛을 볼 때에 경함하는 색"이라는 식으로 말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왜 하필 4,912와 5,750인가? 다른 데에서 자르면 왜 안 되는가? 이유는 없다. 그냥 그게 우리가 보는 방식일 뿐이다.

 

(이때, 나는 그렇다면 앞으로 '초록비'님을 어떻게 불러야 할 것인가, 에 대한 생각을 잠시 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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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밤에 모든 이들이 잠든 사이에 우주 안의 모든 것이 두 배로 커졌다고 상상해보라.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알아낼 방법이 있을까? 당대 저명한 과학자였을 뿐 아니라 재능 있는 대중적 작가였던 쥘르 앙리 푸앵카레가 제시하였던, 모든 시대를 통틀어 가장 유명한 지적인 수수께끼 하나는 이렇게 시작된다.

...

이 사고 실험의 진짜 요점은 이것이다. 변화를 알아내는 것이 불가능하다면, 그렇다면 변화는 있는 것인가? 이 물음은 듣는 이가 아무도 없는 깊은 숲 속에서 나무가 쓰러지면 소리가 나는 것인가 하고 물었던 오래된 형이상학적 수수께끼를 생각나게 한다.

 

(변화가 있다고 해, 그런데 변화가 있음을 누구도 몰라, 그러면 그것은 변화일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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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에 관하여 가장 잘 알려진 사고실험은 1921년 버트런드 러셀이 고안한 사고실험이었다. 세계가 5분 전에 창조되었다고 생각하자. '이전'사건들에 대한 모든 기억과 흔적도 마찬가지로 창조자가 재미 삼아서 5분 전에 만들어낸 것이다. 그렇지 않다는 것을 어떻게 증명할 수 있는가? 증명할 수 없다고 러셀은 주장하였다.... 모든 것은 5분 전에 그런 식으로 창조된 것이므로.

 

(내가 27년 동안 경험한 모든 것들이, 그 기억과 그 증거들이, 이 블로그의 104일간의 기록들이, 사실은 5분 전에 만들어졌더라도, 그렇지 않음을 증명 할 방법이 없군, 정말, 그러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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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앵카레 사고실험의 최근의 재치 있는 변형판은 만일 모든 이들의 쾌락과 고통이 밤새 두 배로 커진다면 어떻게 될까 하고 묻는다.

 

(째질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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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1년 경제이론가 스탠리 제번스는 이렇게 썼다.

'......한 정신이 느끼는 크기와 또 다른 정신이 느끼는 크기를 비교하려는 시도는 결코, 단 한 번도 없었다. 우리가 아는 한, 한 정신의 감수성은 다른 정신의 감수성보다 천 배는 더 클 수도 있다. 그러나 그 감수성의 차이가 모든 방향에서 비율이 같다면 우리는 결코 그 차이를 발견할 수가 없을 것이다. 따라서 모든 정신은 다른 모든 정신에게 불가해하며, 그 어떤 느낌의 공통분모도 가질 수 있을 것 같지 않다.'

 

(늘 궁금했다. 내가 느끼는 정신과 다른 누구의 정신과는 빛깔에서 온도까지 모양이며 느낌, 잔상, 모든 게 다 다를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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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덤 수수께끼

"익명의 편지 얘기가 나왔으니 말이네만, 어떤 사람이 자정에 그 지역 공동묘지로 가라고 써 있는 서명 안 된 편지를 받았네. 그는 보통은 그런 일에 신경을 안 쓰네만, 호기심 때문에 응하기로 했네. 가는 초승달이 비추는 죽음처럼 적막한 밤이었네. 그는 자기 가족의 조상을 모셔놓은 납골당 앞에 있었네. 그 남자는 막 자리르 ㄹ뜨려는 순간 질질 끄는 발걸음 소리를 들었네. 그는 소리쳐보았지만 대답은 없었네. 다음날 아침, 묘지관리인은 그 남자가 납골당 앞에서 얼굴에 무서운 미소를 띤 채로 죽어 있는 것을 발견했네.

      이 남자는 1904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테디 루즈벨트에게 투표했을까?"

"좋아!"홈저는 전보다 더 열의를 띠고 말하였다. "마침내 논리적인 해결책으로 접근할 수 있는 문제로군."

 

.....

 

"자네 말이 맞는 것 같군. 하여간, 그 문제의 답은 '아니오'일세. 그 남자는 루즈벨트에게 투표하지 않았네. 해답을 찾는 것은 문제에 나오는 초승달이라는 게 한밤중에는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는 데에 달려 있지. 세계의 대부분의 지역에서 그렇다는 말일세. 이른바 교육받은 계층의 얼마나 많은 이들이 양치기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이런 간단한 사실을 모르고 있는지 놀라울 뿐이네. 예외가 되는 지역은 극지방일세. 거기서는 태영(그리고 그 옆에 초승달)이 24시간 내내 보이네. 그러므로 그 남자가 미국에 산다면 그는 알래스카에, 북극권 한계선 근처 또는 그 위에 살아야 하네. 알래스카 지역의 시민들은 미국 대통령 선거에 투표할 권리가 없지. 따라서 그의 정치적 견해가 어떠하건 그 남자는 루즈벨트에게 투표하지 못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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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에서 잘 알려진 관용어 중 하나가 '가능세계'라는 말이다. 세계가 왜 지금의 모습인가 궁금해 하는 것은 자연스럽다. 왜 악이 존재하는가? 이 질문을 묻는다는 사실 자체가 우리가 악이 없는 세계, 지금 존재하는 세계와는 상당히 다른 세계를 상상할 수 있음을 증명한다. 가능세계를 생각하는 능력이 인간 지능의 근본이라고 믿을 만한 이유가 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하는 수천 가지 선택은 중요한 것이든 사소한 것이든 모두 상상력의 작용결과이다. 나는 오늘 오후에 내 차를 세차해놓은 세계와 그렇지 않은 세계를 상상하고 어느 세계에서 살 것인지 결정한다.

 

(이전에 읽은 심리학 책에서 비슷한 내용이 있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주변 사람을 평가할 때, 좋은 사람, 착한 사람, 괜찮은 사람으로 평가하고는 하는데, 그 이유는 자신이 좋은 사람들 속에서 살고 싶은 심리가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진실을 알기 보다는, 매트릭스의 편안함을 대부분 추구하고 있는 셈이다. 그런 면에서 현실 자체도 분명 매트릭스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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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의 수학자이자 철학자였던 고트프리트 라이프니츠는 신이 왜 모든 가능한 세계 중에서 지금 있는 이 세계를 창조하기로 선택하였는지 알고싶어 했다. 그리고 독특한 결론을 내렸다. 이 세계가 실제로 모든 가능세계들 중에서 최선의 세계이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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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체'인 물질은 원자로 구성되는데, 원자들은 그 대부분이 허공으로 되어 있다. 허공이 아닌 부분은 양성자, 중성자와 전자들이다. 그런데 이 입자들 역시 대개는 허공이다. 만일 공간이 무한히 분할 가능하다면 아원자입자, 소립자, 소-소립자로 이어지는 입자의 무한한 계열이 있을 수도 있을텐데, 이것들 모두는 거의 대부분이 허공이다. 그렇다면 도든 것은 99.9999999 퍼센트 이상이 무無 일 것이다. 그렇다면 어떤 것을 본다는 것은 불가능해야 한다. 거트루드 스타인의 <오클랜드>처럼, 거기에 거기는 없다 There's no there there.

 

   물리학은 이 역설을 바로 해소한다... 전자는 '외부에 발라져서' 원자를 싸고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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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무의식적인 이중기준 같은 것을 가지고 있는 듯하다. 무한한 시간은 무한한 공간과는 약간 다르게 느껴진다. 공간은 모든 방향으로 무한히 뻗어나간다고 생각하는 것이 자연스럽다고 느낀다(아니면 이것도 문화적으로 주입된 믿음일까?). 시간은 미래의 방향으로만 무한하다고 여겨진다. 우리는 시간이 언제 시작되었는가 묻지만 공간이 어디서 시작되는가는 묻는 일은 거의 없다.

    과거 시간의 무한함은 그다지 인기 없는 생각이다. 그렇기는 하지만 그 생각은 세계가 언제 어떻게 창조되었는가 하는 물음을 무의미한 것으로 치부함으로써 그 물음에 '대답'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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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어그램을 보고 미로를 푸는 것과 안에 들어가서 미로를 푸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다. 수수께끼 책에 그려진 미로는 가끔 한 눈에 해결할 수있을 때도 있다. 그러나 관목수풀 담이나 돌담으로 만든 실제의 미로 안에서는 마음의 지도를 그리기가 쉽지 않다... 실제로는 내가 원을 그리며 돌고 있지 않은데도 그렇게 생각하도록 만들기도 한다.

 

(삶이 미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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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일 유명한 미궁 알고리듬은 '오른손 규칙'이다. 갈래길을 만날 때마다 제일 오른편 가짓길로 가라. 막다른 길을 만나면 마지막 만난 마디점으로 되돌아와서 아직 가지 않은 가짓길들 중에서 제일 오른편 길로 가라.

 

(내 삶에도 알고리듬이 있을까, 있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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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들은 자유의지와 결정론 간의 갈등을 매우 중요하게 다룬다. 결정론적인 세계에 어떻게 자유의지가 있을 수 있는가? 이 물음은 기계론적 철학이 영향력을 갖게 된 이래 철학자들의 마음을 온통 사로잡았다....

 

  이 문제를 다루는 방식은 적어도 세 가지가 있다. 자유의지 같은 것은 없다고 판단할 수 있다. 그런 것은 그런 것이다. 자유의지는 환상이다.

   이 견해의 문제점은 모든 사람들이 대부분의 일에서 자기가 자유의지를 갖고 있다고 느낀다는 것이다... 그러나 내 두뇌에 들어 있는 쿼크와 글루온의 상태가 물리법칙에 따라 엄격하게 결정되어 있다는 것을 내가 알게 된다고 해도, 나는 아마도 내 자유의지가 훼손되었다고 느끼지 않을 것이다.

  

  반대로, 결정론이 착각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이 견해는 대부분의 현대 사상가들에게 별로 매력이 없다. 이 입장을 택하려면, 나는 지난 5세기의 과학에서 등을 돌리고, 자연법칙이(양자이론에도 불구하고) 사건을 제약한다는 사실을 부정하고, 사건들이 그런 식으로 발생하는 게 아니라고 주장해야 한다.

  '양립론'은 자유의지와 결정론 간에 어떤 본질적인 모순도 없다고 말한다....우주에서 혼돈이 맡고 있는 역할에 대한 우리의 인식이 성장하면서 이 입장은 설득력을 더해가고 있다.

 

  자유의지란 내가 하고 싶은 대로, 비록 내가 하고 싶은 것이 내 머릿속에 든 뉴런의 상태에 따라 미리 결정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하는 것을 의미한다.

 

... 어쩌면 신은 내가 내일 아침에 치약 튜브를 중간부터 눌러서 짤 것인지 아닌지를 알 것이다. 그러나 신이 그것을 내게 말해주지 않는 한, 아무 문제도 없다. 용납할 수 없는 경우는 내가 어떠 어떠한 선택을 하기로 운명지워져 있고 이 모든 무감각한 원자들의 동작에 의해서 그것을 하도록 '강요'받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경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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