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를 배구에 빠져들게 한 장본인이, 새벽에 통닭을 먹다가 떠오른 취감으로
두 시간 동안 썼다는 엽편....
나와 김연경 선수의 로맨스라는데....
희귀 동물
서...
구성원에게는 누구나 각자 주어진 소임이 있다.
고 생각한다. 때문에 나에게도 주어진 소임, 즉 내가 하지 않으면 안되는 어떤 주제와 사건이 있다고 여겨지는데 다음의 이야기는 적
어도 내가 해야 한다고 여겨지는 경험에 관한 회상이다.
크리스마스가 며칠 지난 어느 오후, 머리를 깎기 위해 미용실에 들
어간 미용실은 북적거렸다. 연말 치고는 따스한 날씨라 거리에 사
람이 많을거란 예상이 빗나간 것과는 대조적이었다. 윙윙 돌아가는
드라이기의 모터소리, 사각사각 넘어가는 질 좋은 잡지의 음향, 라
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발라드 음악에 약간 현기증을 느꼈다.
"이리 오세요."
앞치마를 두른 젊은 여자애가 나를 잡아끈다. 문득 능숙하게 보
이고 싶은 욕망을 느끼면서 코트를 건넸다. 사실 이런 유의 서비스
에 익숙하지 못한 편이라 급작스러운 친절은 불쾌하기까지 느껴지는 것이다.
은행 가서 번호표를 들고 서서는 띵동거리며 다가오는 순번에 긴
장하고 직장동료들과 레스토랑에라도 갈라치면 동료들이 음식을
시킬 때까지 화장실에 숨어있는 일이 다반사다. 당연할지 모
르지만 극장에 가서도 단 한번도 TTL카드로 할인 받은 적도 없다.
물론 이런 성격은 고생을 동반하는데 은행에서는 '전표 써서 다시
주세요.' (그럼 번호표를 다시 뽑아야 한다. 젠장.) 라는 말을 듣게
된다거나 레스토랑의 가장 싼 메뉴만을 먹게 되는 (늘 동료들이 성
의없이 주문하므로. 젠장) 고생이다.
여자애는 나의 머리 속은 아무 관심도 없는 듯이 코트를 받아들고
는 종종걸음으로 시야에서 사라졌다. 거울에 비춰진 내 포즈는 말
그대로 형편 없.었.다. 젠장.
미용실 안에는 적어도 스무 명 정도의 여자, 남자, 늙은이, 애 들이
섞여서 분주했지만 일정한 룰에 의해서 유기적으로 움직였다. 난
맛없는 커피를 마시면서 자리가 나기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이대
로라면 앞머리를 90도로 커트한, 키가 커보이는 여자아이의 자리에 앉게 되거나 (개인적으로 그곳에 안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뚱뚱
하고 보라색 남방을 입은 고집 '쎄'보이는 안경잡이 여자의 자리
가 유력했다. (왠지 그곳은 앉기 싫었다.)
둘의 경주를 바라보면서 화장실에 가야 할 상황이라고 느꼈을 때
라디오가 치직댔다. 황금빛 딸랑이가 울었다. 드라이기가 멈추고
미용실의 사람들의 시선이 문쪽으로 쏠렸다. 눈치없는 크리스마
스 트리만이 반짝반짝 변함없었다. 라디오에서 바이올린 음악이
흘러나왔는데 아주 신경을 곤두세우게 만드는 음이었다.
두 명의 습격자는 믿음직스러워 보이는 산탄총과 섹시하다-고 할
만한 45구경 권총(아는 구경이 그것 밖에 없다는 사실을 나중에
깨달았다.)을 흔들면서 시범적으로 두 방을 갈겼다. 굉음이 터지고
사람들은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엎드렸다.
한 여자가 가슴에 총을 맞고 내 앞에 쓰러졌는데 안타깝게도 머리
염색 중이었는지 검은 염색약이 안면에 흘러내리고 있었다. 즉사였
다. 습격자 중에 한 명이 중얼거렸다.
"거울이 아니네."
그들은 착각이라고는 하지만 무턱대고 죽인 건 잘못이네, 실수였네,
툭닥대더니 곧 큰 소리로 외쳤다.
"우리는 테러범이다!"
그리고는 머쓱했는지 움직이지 말고 가만히 있으라고 덧붙였다. 라
디오 음악도 어느새 끊기고 정적이 흘렀다.
사이렌 소리가 흐른 건 습격자 중에 한 명이 죽은 여자의 지갑을
뒤지고 있을 때 였다.
"
과연- 나도 동의했다. 사이렌 소리가 가까워지자 습격자들은 음흉
한 미소를 지었다. 내 옆에 있던 그 고집 쎄 보이는 뚱보가 내 허리
를 쿡 찔렀다. 뚱보는 고개를 푹 숙인 채 속삭였다.
-저기, 아저씨. 아저씨가 도대체 왜 그러는지 물어나 좀 봐요-
-내가 왜요?-
-아저씨가 남자잖아요.-
(이 여자가 말 거는데 어떻게 할까요, 라고 말할까. 했지만 키 큰
아이가 왼쪽에 있었기 때문에 참았다.) 난 고개를 들고 배에 힘을
주었다.
"저기-"
그 순간 경찰의 목소리가 확성기를 통해 들려왔다.
"인질범은 들어라. 요구조건이 뭐냐?"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은 역시나, 젠장이었다.
습격자는 미용사의 목을 끌어안고 창문을 부수고는 총을 쏘아댔다.
"일단! 우리는 인질범이 아니다. 테러범이다."
확성기와 입의 거리를 잘못 쟀는지 저런, 미치-ㄴ 소리가 들렸다.
인질범과 테러범의 차이를 이해하지 못하는군, 습격자는 고개를 흔
들었다. 또다른 습격자는 우리를 2열로 앉히는 중이었다.
"요구조건 따위는 없다."
경찰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요구조건이 없으면 경찰은 그냥
가야하는 걸까, 라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이미 사람이 죽
었으므로 그럴리는 없었다. 아무래도 확성기가 고장났는지 또 어
쩌라구, 벼-ㅇ 소리가 새어 나왔다.
우리는 공포체험을 기다리는 아이들처럼 2열로 앉아서는 바닥만 바
라보고 있었다. 실고추처럼 타일에 널려 있는 머리카락을 아흔 한
개 세었을 때 습격자 중에 하나가 우리에게 고개를 들라고 명령했
다.
"너희를 모두 죽일테야."
이 말을 듣고 보라 뚱보가 분연히 일어났다.
"내가 왜 죽어야 되는데?"
뚱보의 얼굴은 눈물이 흐르고 있었고 안경이 코 끝에서 실룩였다.
습격자는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되물었다.
"그럼 넌 왜 살아야 되는데? 큭큭- 농담이고, 너 팝콘 좋아하니?"
뚱보는 살 수 있다는 희망을 발견했는지 주저하지 않고 대답했다.
"예! 특히-"
탕! 정말, 가차없이 죽였다. 가련한 뚱보. 팝콘 좀 덜 먹었으면 성
인병 위험도 없고 손에 기름기 쪽쪽 빠는 일도 없고 좀더 오래 살
수 있었을텐데. 습격자는 우리에게 특히 영화 볼 때 팝콘 먹는 것
들 중에서 빨리 죽고 싶은 사람은 앞으로 나오라고 말했다.
"아, 맞다. 오징어도."
순식간에 죽어버린 뚱보의 몸은 여전히 덜덜 떨렸다.
"솔직히 너희들이 살아야 하는 이유도 없잖아. 여기 극장에서
태극기 휘날리며 본 사람?"
뚱보의 여파 때문인지 아무도 움직이지 못했다.
"그리고 실미도까지 본 사람? 솔직히 말해봐. 두 영화 관객만 합쳐
도 대한민국 인구의 절반이야. 열 일곱 중에 한 명도 없다는 건 말
이 안돼."
상당히 침착한 어조였는데도 손드는 사람은 없었다. 습격자는 후
후- 웃었다. 너희들이 그럴 줄 알았다는 어조였다.
"이따가 영화내용 물어봐서 모르는 사람은 그냥 죽일꺼야. 오케이.
그럼 안 본 사람?"
난 손을 들 수 밖에 없었다. 괜히 영화내용을 물어보게 만들 필요
는 없었다. 지금 생각해도 1%의 가능성이라도 살리는 합리적인
판단이었다. 솔직함은 만고불변의 무기라는 믿음을 갖기로 했다.
습격자의 눈빛이 조금 흔들렸다.
"최근에 본 영화가 뭐지?"
"메종 드 히미코입니다."
"증명할 수 있나?"
난 영화를 보고 나면 티켓을 소중히 다뤄서 다이어리에 극장별로
모아두는 타입이었으니까 주저하지 않고 다이어리에서 티켓을
꺼내 보여주었다. 어느새 습격자 두 명은 나란히 서서는 내 콜렉
션을 확인하면서 감탄사를 내뱉고 있었다.
아! 오! 음! 헤~
"오, 세드릭 칸의 권태... 1만 796명 중에 한 명이었군. 아무도 모
른다... 히로카즈의 팬인가? 토니 타키타니는 두 번 봤군. 1만 751
명 중에 두 명인 셈이네."
또다른 습격자도 총을 꺽어쥐고는 나를 위 아래로 훌어보면서 말
했다.
"브로큰 플라워를 본 상영관, 회차에 나도 거기 있었어!"
습격자들은 적지 않게 감동하는 듯이 보였다.
"자네는 희귀동물이군."
그게- 무슨 말입니까. 난 같이 영화를 본 사람을 쉽게 죽이지 않
겠지, 라는 생각으로 되물었다.
"보호받아야 된다는 말이야."
나머지 16명의 눈이 동그래졌다. (왜, 사람들의 그 무관심한 듯한
눈은 +, Benefit, Bonus, 은밀한 섹스에만 동그래지는 것일까.) 일
제히 저도 봤어요- 라는 말이 쏟아져 나왔다. 하지만 습격자들의
반응은 냉담했다. 티켓을 제시해- 라는 말과 함께 동시에 미용실
은 다시 크리스마스 트리만 번쩍거리는 마법이 행해졌다. (살아
나간다면 언젠가 나도 북적이는 종로의 술집이나 혀를 마시는 인
사동의 어느 찻집에서 말해 볼 심산이다. '티켓을 제시해.")
"넌 나가도 좋다."
이걸 감사하다고 해야 할 지, 적당히 거절해야 정말 살아나갈 수 있
는지 고민하고 있을 때 습격자 중 한 명이 말했다.
"걱정하지말고 나가. 넌 보호대상자야. 천만 관객 중에 우리가 만
명을 죽인다고 해도 구백 구십 구만 관객이 남아. 티도 안나지. 하
지만 넌 달라. 그러니까 넌 나가도 좋아."
그의 말은 신뢰감이 물씬 담겨져 있어 나도 모르게 자신감이 몸에
솟는 느낌이었다.
"죄송한데, 저기 키 큰 아가씨도 같이 나가면 안될까요?"
"왜? 여자친구인가?"
난 조심스럽게 말했다.
"아니요. 하지만 같이 영화를 보고 싶은 외모라서요."
습격자는 45구경 총구로 귀 밑을 벅벅 긁었다.
"야, 키 큰 아가씨. 넌 이 녀석과 함께 나갈 용의가 있나?"
난 일순 긴장했다. 이건 14세기 중반 쯤 중동의 어느 노예시장에서
생사를 두고 싸움을 벌이는 검투사가 된 기분이었다.
"제 신장은 188cm입니다. 그리고 아가씨가 아니라
해요. 나갈 용의야 물론이구요."
갑자기 한 여자가 벌떡 일어섰다.
"저를 데리고 가세요. 저도 그 영화 보고 싶었어요. 근데 너무 빨리
극장에서 내려서 못 본 것 뿐이에요!"
탕! 못 봤으면 닥쳐도 좋다. 라는 게 습격자의 대답이었다. 게다가
전 아직 처녀란 말이에요- 흑흑, 여자는 흐느꼈지만 그다지 마음에
와닿지는 않았다.
"그래, 알았어. 188의 연경씨. 하여간 이 녀석과 어서 나가."
나보다 5cm나 더 큰데다가 팔다리가 길어서 멋져보이는 그녀를
바라보면서 잘했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어느새 그녀는 내게
다가와 내 손을 꼭 잡아 주었다.
그 길로 우리는 딸랑거리는 문을 밀치고 밖으로 뛰쳐 나온 셈인데
경찰에 휩싸여 어디론가 끌려가느라 그녀와는 한동안 헤어져 있
었다. 경찰은 물었다.
"당신들을 풀어 준 이유가 뭐죠?"
"희귀동물이니까요."
내 대답에 경찰은 이런 미친- 하면서 째려보았다. 솔직하게 대답
하면 이런 반응을 보이는 부류가 있다. 난감한 일이다.
하여간 경찰의 진술서야 어찌됐든, 시간이 지난 지금 난 연경이와
잘 살고 있다. 가끔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소임대로 다큐멘터리
를 보기 위해 EBS건물을 찾거나 우리에게 맞는 조금은 '불친절'
한 영화를 보기 위해 개봉일을 체크한다.
언젠가 연경이에게 물은 적이 있다.
도대체 우리를 왜 살려준걸까?
연경이는 90도 커트 앞머리를 질끈 누르며 대답한다.
"아니, 그럼 장수하늘소는 왜 보호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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