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빛들을 쓰다

 

 

                                       오태환

 

 

   필경사(筆耕師)가 엄지와 검지에 힘을 모아 철필로 원지 위에다 글씨를 쓰듯이 별빛들을 쓰는 것임을 지금 알겠다

  별빛들은 이슬처럼 해쓱하도록 저무는 것도 아니고 별빛들은 묵란(墨蘭)잎새처럼 쳐 있는 것도 또는 그 아린 냄새처럼 닥나무 닥지에 배어 있는 것도 아니고 별빛들은 어린 갈매빛 갈매빛 계곡 물소리로 반짝반짝 흐르는 것도 아니고 도장(圖章)처럼 붉게 찍혀 있는 것도 아니고 더구나 별빛들은 반물모시 옷고름처럼 풀리는 것도 아니고

  별빛들은 여리여리 눈부셔 잘 보이지 않는 수평선을 수평선 위에 뜬 흰 섬들을 바라보듯이 쳐다봐지지도 않는 것임을

  지금 알겠다 국민학교 때 연필을 깎아 치자(梔子)열매빛 재활용지가 찢어지도록 꼭꼭 눌러 삐뚤빼뚤 글씨를 쓰듯이 그냥 별빛들을 아프게, 쓸 수밖에 없음을 지금 알겠다

  내가 늦은 소주에 푸르게 취해 그녀를 아프게 아프게 생각하는 것도 바로 저 녹청(綠靑)기왓장 위 별빛들을 쓰는 것과 하나도 다르지 않음을 지금 알겠다

 

 

 

 

 

별들을 읽다

 

 

                                         오태환

 

 

별들을 읽듯이 그녀를 읽었네

가만가만 점자(點字)를 읽듯이 그녀를 읽었네

그녀의 달걀빛 목덜미며

느린 허리께며

내 손길이 가 닿는 언저리마다

아흐, 소름이 돋듯 별들이 돋아

아흐, 소스라치며 반짝거렸네

 

별들을 읽듯이 그녀를 읽었네

하얀 살갗 위에 소름처럼 돋는 별들을

점자(點字)를 읽어내리듯이

내 손길이 오래 읽어내렸네

그 희미하게 반짝거리는 낱말들의 뜻을

눈치 못 채서 참 슬픈

내 손길이 그녀를 오래 읽어내렸네

 

그녀를 읽듯이 별들을 읽었네

그녀를 읽듯이 별들을 읽었네

춘천 가는 길 백봉산 마루께에 돋는 별들을

점자(點字)를 읽듯이

희미한 연필선으로 반짝거리는 그녀의,

낱말들의 뜻조차 알지 못하면서

서운하게 서운하게

 

 

 

 

 

 

 

 

이처럼, 상당히 시에 많은 것들 걸고 시를 쓰는 분들을 보면

적극적으로 자신의 소명이 시인임을 시로서 나타내려 애쓰는 분들을 보면

나도 이처럼 되고 싶어서, 무섭다.

 

그래도 나는 이렇게 되지 말아야지.

 

나는 여전히 홀든 콜필드처럼 쓰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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