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누군가에게 무언가를 줄 때는 그것이

버릴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서 버려도 버려도 버려지지 않는 상처 같은 것을 주어서는 안된다.

 

그런데 아마도 최소한 몇 명은 내게서 그런 상처를 받았을 것이다.

그 몇 명 중 한 명이 이미 죽어서 다행이다.

 

어디까지나 '상처'는 하나의 예일 뿐이고

또, 상처 같은 건 주려고 주는 것도 아니고 주려고 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내가 아이 낳는 것에 반대하는 이유 중에 하나는

종족보존의 욕구가 원하고 원하지 않고와 상관 없이 억지로 주어졌고

그게 버려지지 않기 때문이다.

 

15세 정도에, 성욕을 알기 시작 할 때 쯤에

너희들에게는 이제 곧 이런이런 것이 생기는데 그것을 성욕이라고 한다.

그것의 좋은 점은 이런 이런 것이고 안좋은 점은 이런 이런 것이다.

이 성욕을 허용하겠느냐, 허용하지 않겠느냐,

라는 선택이 주어지기를 바란다.

 

삶이라는 건 그래야 하지 않나.

 

25세 정도에, 아이를 갖고 싶어지고 가정을 꾸리고 싶어지고

미래에 대한 두려움과 자신을 바라보고 자신의 삶을 이어갈 분신을 낳고 싶어 질 때

다시 선택권이 주어지길 바란다.

종족보존의 욕구를 허용하겠는가, 허용하지 않겠는가.

 

그래서 수술이든, 주사든, 최면이든

어떤 욕구를 버릴 수 있는 기회가 주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삶의 욕구가 될 수도 있을 테고

죽음의 욕구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버릴 수 없는 것을 주어서는 곤란하다.

 

지금 우리가 사는 우주에 신이 존재하고 있다고 가정할 경우,

이 신은 무척이나 사람들을 곤란하게 만들어 놓았다.

 

내가 버리고 싶은 것 중 하나는 질투심.

 

질투는 사람을 초라하게 만들고 왜소하게 만든다.

다른 사람들을 그렇게 만드는 건 좋은데 나를 그렇게 만든다.

 

내가 가장 부러워하는 사람은 질투하지 않는 사람이다.

 

그러나 정작 질투심을 버리려면 버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면서도

버리려고 하지 않는데, 그것은 내가 정말로 이걸 완전히 버릴 경우에

내 삶이 어떤 모습일지 예측이 쉽지 않은 데다가(그만큼 질투심에 의지해 살아왔다)

이렇게 질투심을 모두 버린 나를

보통의 사람들이 질투하지 않으면 어쩌나 하는 불안 때문이다.

 

결국 내가 질투하지 않는 사람이 되고 싶은 이유는

그 사람이 부럽기 때문이고 일종의 질투 때문이다.

 

사람은 쉽게 남 얘기 하기를 좋아하는데

술이라도 한 잔 들어가면 더욱 그렇다.

나야 뭐 술에 취한, 혹은 취한 척 하는 군상들이

(그 기준은 총을 들이댈 때 피하느냐 피하지 않느냐에 있다, 대부분은 피한다,

취한 척 하는 것이다)

내 얘기 하는 걸 좋아한다, 왜냐하면 나에 대해서 나쁘게 얘기하는 사람은 없는 데다가

설혹 나쁘게 얘기하더라도 나는 그들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생각할 테니까.

 

질투는 야비한 차원이 아니다 - 나는 야비한 사람이 되는 걸 거부하지 않는다.

 

질투는 뭐랄까 그림의 스케일을 작게 만든다.

질투는 언덕을 오르락내리락하다가 인생을 끝나게 만든다.

질투는 다양한 감정과 경험을 섞어 만들 수 있는 최악의 칵테일이다.

질투는 빛의 색깔을 상하게 만든다.

질투는 냄새가 난다.

 

 

 

질투

 

해결되지 않기 때문에 질투를 싫어한다 

 

 

아무튼 버리지 못할 걸 주는 건 사양한다.

전력으로 몇 가지를 버렸다.

이번주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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