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은 이미 10여일 전에 그녀가 죽었다.

소니 워크맨 씨디 플레이어라고 불리기를 싫어했던

희고 반짝이던 그녀.

 

내가 질투를 느꼈던 것은 그녀가

이 여자건 저 여자건 이 남자건 저 남자건 가리지 않고

가슴 속에 넣고 회상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보다 내가 그녀에게

아무런 input을 해주지 못하고 오로지

그녀의 양손을 내 귀에 대고 따듯하게

우려먹기만 했기 때문이다.

 

 

 

 

용산까지 찾아간 병원에서는

이미 재생불능으로 사망했으나 장기 교체를 통해

다시 그녀의 음색을 가질 수도 있다고 말했다.

수술비는 8만원.

 

 

내 사랑이 작다면 작아서

혹은 애착이 없다면 그래서

나는 그녀를 포기한다.

그녀의 버튼을 순서대로 하나씩 눌러본다.

아무런 음성도 재생하지 못하지만

또 그런 자신의 상태가 분한 듯

몸체에서는 처음 듣는 괴음이 그윽- 그윽- 울린다.

차라리 아무 소리 없는 편이

내 맘은 편했을 텐데 그윽- 그윽-

 

 

 

 

그녀의 몸으로부터 장기를 분리해냈다.

배터리며 리모콘이며 이어폰 등을...

내게 새 애인이 생겨 품고 다닐 때

어쩌면 그녀의 배터리나 그녀의 리모콘이나 그녀의 이어폰을

새 애인 몸에 붙여 사용할 지도 모른다.

 

한 편으로는 그러기를 바란다.

 

 

 

 

땅을 팠다.

땅은 곱게 파였지만

그녀만큼 곱지는 않았다.

이 땅의 벌레들이 그녀가 어떤 존재였는지를

알아주기를 바라는 것은 내 욕심이겠지.

욕심까지 묻고 싶었지만

욕심은 끝내 묻히지 않는다.

스파이더맨이 거미줄을 뽑듯

욕심은 줄줄줄 이미 내 일부가 되었다.

 

 

 

가장 후회되는 일은 저 낙인 같은

SONY 흔적을 지워주지 못한 것이다.

출생을 몸에 붙이고 사는 건

소유 받기 위해 태어났다는 것과 같다.

나는 그녀를 소유했지만,

그렇다고 그녀가 그런 존재인 것은 아니다.

그녀 또한 나를 소유했기 때문이다.

 

 

사람은 단호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묻을 땐 묻고 캘 땐 캐야 한다고.

그런데 왜들 그게 안되는 걸까, 는 그렇다치고

왜 나조차 그게 쉽지 않을까.

소중한 사람을 묻을 때, 왜 사람이 자기 손으로 직접

묻지 않는지를 어느 정도 알 것만 같았다.

자기 손으로 묻다보면

도무지 뭘 묻고 있는지를

갈피를, 정체를, 이유를, 본래 의도했던 바를

잡아낼 수가 없다.

 

난... 뭘하는 거지

 

 

이젠 나도 모르겠다.

저기서 뭐가 자라든지 혹은

내 속에서 뭐가 자라든지.

잡초, 라도 그녀에겐 잘 어울릴 테다.

그녀에겐 나도 제법 잘 어울렸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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