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에는 면도 묻어있고 점도 녹아있다
나는 선이 좋다
선이 길이 되도 좋고
선이 무덤이 되도 좋다
이젠 기억도 나지 않지만,
그래도 기억한다
초등학교 운동장 옆 보도블록에서 기어 나온
지렁이가 보도블록을 덮은 운동장 모래를
뚫고 구불구불 지나가서 생긴 흔적
그때나 지금이나
말이 통하지 않는 것들의 행동은 호기심을 자아낸다
대체 어디로 가는 거지?
무얼 써보려고 했는가 하면
아니 그보다 어디서 시작된 생각인가 하면 이렇다.
여자들의 특성 중 하나로 남자로서는 잘 이해가 가지 않는 점 중 하나로
이런 것이 있다.
좋아하기는 하는데, 어느 선 이상은 가까와지길 바라지 않고, 그렇다고
멀어지기도 바라지 않는
그 어중간히 친한 선에 이성을 두려 하는 경우가 있다.
조금 더 적나라하게 예를 들자면
남: 사귀자
여: ....
남: 사귀자
여: ...
남: 말을 해. 사귀든가, 말든가, 결정을 해줘, 답답해, 못견디겠어, 일부러 괴롭히는거야?
여: ...
남: 대답 없으면 싫다는 걸로 알게. 그리고 사라질게.
여: ...
남: 좋아, 알겠어. 사귀기 싫은 거는 알겠는데 대체 왜 말도 안해주는 거야? 그 이유나 알자.
여: 나도 그대를 좋아하삼, 그러나 그대의 프로포즈를 거절하면 그대가 더 멀어질 것 같삼,
그대가 소중한 만큼 그대를 잃고 싶지 않삼, 그러니까 그냥 이대로 친한 친구 사이로
있으면 좋을 것 같삼.
이런 식인데,
물론 이게 내가 겪은 일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참 힘든 걸 요구하는구나, 이 여자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내 속을 들여다보면
이성의 선이 있고
감정의 선이 있는데
감정에 의해 이성의 선이 방향을 바꾸기도 하고
이성에 의해 감정의 선이 방향을 바꾸기도 한다.
그러나 대부분, 감정의 선에 의해 이성의 선이 방향을 바꾸는 경우가 많은데
예를 들어
좋아하는 감정을 멈추기 위한 이성의 노력은
수 십 가지의 좋아하지 말아야 할 이유와 방법을 찾는 등
애를 써도 헛수고가 될 경우가 많고
반면
좋아해선 안되는 이성적인 이유 같은 것들은
좋아하는 감정 앞에서 별 이유도 없이 순식간에
무너져버리고는 한다.
인간은 이성적인 동물이라는데
이렇게 허구헌날 감정에 우왕자왕 울었다 웃었다
일도 손에 안잡히고 뭣도 안되고 어쩔시구리구리 하는 것을 보면
인간은 꽤 감정적인 면이 강하다, 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사실, 그건 착각이다.
갈등하고 방황하는 인간의 감정
이성을 괴롭히는 감정들은 사실
이성에 의해 허락받은 감정들이다.
다시 말해서, 매일 매일 술 퍼마시고 잃어버린 사랑에 괴로워하는
청춘군상의 경우, 그의 이성에 의해
그래, 이쯤은 괴로워해도 회복할 수 있으니
핫껏 괴로워하렴, 내가 커버해주마,
라는 이성의 허락을 받은 상태로
술 퍼마시고 전화하고 오바이트하고 고성방가를 하고
쓰러져 잠드는 것이다.
대부분의 경우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눈 하나를 빼주거나
손가락 하나를 자르는 결단을 함부로 하지 못한다.
"너를 위해서라면 죽을 수도 있어"라는 말은
그야 물론 죽지 않을 수도 있어, 라는 속셈이 깔려있는 말이다.
사랑을 잃은 우울과 병폐는 어느 정도
낭만적으로 보이게 마련이고
얼마 정도는 감정적 이성적 괴로움이 있더라도
그래 잠시는 낭만적 고통 속에 있음을 이성에게 허락받아
감정은 땡깡부리고, 이성은 감정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발발거리며 별별 수단을 강구해본다.
그러나 일단
이성의 허락을 받는다는 말이 이성에 조종 당한다는 말은 또 아니다.
그러니 암튼,
여성이 말한 대로의 경계선을 유지시키기란
아주 어렵다는 말이다.
감정은 가까워지려 하고
여성이 원하는 감정의 목표는 더이상 가까워지거나 멀어지지 않는 평행선이고
그렇다면 그런 평행상태로 감정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이성은 어느 정도 거리를 두거나
어느 정도 미운점을 찾거나
어느 정도 외면 하거나
어느 정도 반감을 갖거나
어느 정도 회의와 포기를 하는 등
여성쪽으로 향하려는 감정을 평행선으로 만들기 위해서
참으로 애를 써야 하는 것이다.
그러니
이제껏 그렇게 자신에게 잘해주던 남자 녀석이
차갑게 대하고 삐딱선 타고 멀어지려 하고
전과 다르게 행동한다면
나름대로 감정의 수위를 조정하기 위한 것일 수 있다.
유치하더라도
그런 걸 잘 못하기 때문에
좋은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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